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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브토바역.  화려한 내부 인테리가 돋보이는 이 지하철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독일군의 봉쇄에 맞서 872일을 버티고 승리한 시민들을 기리는 의미로 건설되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브토바역. 화려한 내부 인테리가 돋보이는 이 지하철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독일군의 봉쇄에 맞서 872일을 버티고 승리한 시민들을 기리는 의미로 건설되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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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언젠가 러시아를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지하철을 '꼭' 타보기를 바랍니다.

꼭 잡아야 합니다. 러시아의 지하철은 매우 깊습니다. 역사에서 승강장까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긴 곳은 3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오르고 내릴 때는 현기증이 느껴질 수도 있으니, 옆에 있는 손잡이를 안전하게 붙잡기 바랍니다.

꼭 둘러봐야 합니다. 바쁜 시간에 쫓겨 급히 걷거나 피곤해서 눈 감던 평소의 습관에서 벗어나, 역 안의 장식과 인테리어를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고풍스러운 박물관에 와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과 그 역이 위치한 지역의 특색이 담겨 있는 벽화나 조형물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지하철 문이 닫힌다고 급히 달려가지 마십시오. 다음 열차가 매우 빨리 올 테니 여유를 가지셔도 좋습니다.

대부분 국가의 지하철이 각 호선별로 규격화된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있다면, 러시아의 지하철역들은 역사부터 내부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특징을 반영하여 각기 다르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19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이 개통될 때, 뉴욕타임스에서는 '연이어 서 있는 20세기의 지하궁전'이라고 묘사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지하철의 1회 티켓 가격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45루블, 모스크바가 55루블이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천원 안팎인 셈입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 지하철만 전문적으로 둘러보는 투어 상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실제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단체 관광객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각 역이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고 있다면, 단돈 천원으로 떠나는 지하철 투어는 러시아를 이해하는 훌륭한 여행코스가 될 수 있습니다.

舊 해군성 건물로 갈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디미랄떼이스까야역.  이 역에서는 러시아 해군과 관련된 인물과 벽화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舊 해군성 건물로 갈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디미랄떼이스까야역. 이 역에서는 러시아 해군과 관련된 인물과 벽화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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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을 통해 러시아로 입국할 때의 긴장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지속적으로 주입되었던, '북괴'를 지원하는 '악의 제국'이었던 소련의 어두운 이미지가 무의식 속에 아직까지도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러시아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지는 이미지는 세대별로 다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제는 추억의 단어가 된 '소련 공산당'의 음흉함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이상향' 혹은 '그 이상의 몰락'으로, 또 다르게는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을 맞이하던 그들의 가난한 생활상으로, 또 다르게는 수많은 문학과 음악의 거장들을 배출한 예술의 동토(凍土)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입견과는 달리 싱거운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온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느 유럽과 다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는 유럽을 닮고 싶었던 차르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유럽에 비해 러시아가 후진국이라 생각했던 '잘 나가던' 군주 표토르 대제. 그는 원래 늪지대였던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심하고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해서 도시를 만들도록 명합니다. 모두가 무모한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유럽을 향한 강대한 제국을 꿈꾸는 차르의 의지는 강력했습니다. 

워낙 열악한 지형이라 도시 건설에 필요했던 자재들부터 먼 곳에서부터 옮겨 와야 하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이 도시는 100개의 섬을 365개의 다리가 연결하며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북방의 베니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어마어마한 대역사의 이면에는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 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격동의 러시아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일어났던 궁전광장. 겨울궁전과 에르미타주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격동의 러시아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일어났던 궁전광장. 겨울궁전과 에르미타주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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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를 영화처럼 만드는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때에 절정을 이룹니다. 1941년 파죽지세로 소련을 향해 진격하던 히틀러의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레닌그라드로 불리던 이곳을 먼저 점령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에 도시를 빠져 나갈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열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열차에는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신 폭격에 소실될 것을 우려하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예술 작품들을 실어 내보냈다고 합니다. 이후 무려 872일간이나 지속된 봉쇄 속에서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80만명이 굶어 죽었지만, 시민들은 끝내 도시를 지켜 내었고 이 승리는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장면이 됩니다. 추위와 배고픔, 폭격으로 이어지는 참혹한 시기에도 음악연주회를 통해 서로를 위로했던 기억은 전설처럼 회자되며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뒷이야기를 알고 바라보는 곳곳의 정경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작품들은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렘린 성벽과 그 앞에 조성된 레닌의 묘. 이 피라미드 안에 방부처리로 영구보존되어 있는 레닌이 누워 있습니다.
 크렘린 성벽과 그 앞에 조성된 레닌의 묘. 이 피라미드 안에 방부처리로 영구보존되어 있는 레닌이 누워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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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KTX에 해당하는 고속열차 삽산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가장 빠른 고속열차로 4시간을 달려왔지만, 러시아 지도로 보니 손톱만큼의 이동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대륙의 긴 호흡을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붉은 광장'에는 모스크바 하면 연상되는 모든 것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테트리스 게임의 배경으로 유명한 양파 모양 지붕의 성바실리 대성당, 냉전시대는 물론이요 지금까지도 정부를 상징하는 주어인 크렘린,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굼 백화점으로 광장은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지도자 레닌의 시신이 방부처리되어 안장된 묘가 있습니다. 제한된 요일과 시간 동안만 입장이 허용되고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는데, 레닌 묘를 찾아갔던 날, 수많은 인파 속에서 1시간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후 100년이 가까워 오지만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레닌에게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100년 러시아의 이상과 추락도 함께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숫자로 기념하기 좋아하는 우리네 습관에서 보자면 올해는 러시아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2월에 차르의 군주제를 무너뜨렸고, 같은 해 10월에는 인류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7년째 장기집권을 하며 서방세계로부터 '신(新) 차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속내는 복잡한 모양입니다. 차르를 몰아낸 혁명의 의미를 부각하자니 자신에 대한 비판여론이 힘을 얻을 수 있고, 아무런 기념과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니 애매한 상황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모순의 대안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련식 사회주의는 분명 실패한 모델입니다. 그러나 작년에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레닌에 대한 긍정 평가가 53%인 반면에 스탈린에 대한 긍정 평가는 28%로 나오는 것에서 보듯이, 볼셰비키 혁명의 의미를 이후의 전개 과정에 대한 성찰 없이 무 자르듯 단순하게 평가하는 일은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했던 스탈린식 사회주의와 그의 공포 정치는 애초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도 방향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비에트라는 용어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평의회'에 가까운데, 현실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참여 없이 소수의 당, 관료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한 전체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이타적인 본성이 뒤섞인 인간 존재의 복잡다단한 양면성과 그에 기반한 사회적인 시스템 운영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기계적인 학습으로 인간의 이타성 발현을 맹신했던 사회주의는 이기적인 욕망에 모든 초점을 두는 자본주의의 야수성만큼이나 위험한 단견임에 틀림없습니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와 실패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적인 욕망이 가지는 장점과 자율적이고 자발성에서 비롯되는 창조성의 제거에서 가장 큰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썩지 않고 누워 있는 레닌의 시신은 대단히 비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죽은 생명은 흙으로 돌아감이, 허공으로 돌아감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사실 그는 사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시신의 방부 처리와 영구 보존은 이후 권력자들의 정치적인 셈법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지금이라도 레닌을 어머니 곁으로 땅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하나의 시대를 마감하는 자연적이고 순리적인 방안이라 여겨집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서 늘어선 좌판서점들.  손녀의 책을 골라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서 늘어선 좌판서점들. 손녀의 책을 골라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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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 러시아에 들어가면서 지하철을 타면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20년 전 당신이 러시아의 지하철을 통해 인상 깊게 보았다던 장면들입니다. 하나는 지하철을 건설했던 주체로서 당당한 노인들의 모습과 그 공로에 대한 젊은이들의 존중이었고, 다른 하나는 손에 책이나 꽃을 든 러시아 사람들의 서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컨대, 노인이 지하철에 들어서면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은 세계 어느 곳의 풍경과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손에 가장 많이 들려 있는 것은 역시 스마트폰이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제 지구촌에서 웬만한 오지를 제외하고는 목격하게 될 인류 공통의 모습일 것입니다. 

다만 모스크바의 명동으로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에 늘어선 많은 중고책 좌판과 거리에서 자주 목격하게 되는 꽃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책과 꽃으로 상징되는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30년이 가까워지는 개혁개방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울과도 뉴욕과도 런던과도 다름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최고 강령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 온 85%의 인민이 이제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낯선 장치 속에 던져지고 또다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던 20년 당신의 전망과 "세상의 진정한 변화는 지상의 변화가 아니라 지하의 변화"라야 한다는 화두는 러시아에 여전한 숙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아니 러시아만의 숙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숙제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국민 시인 푸시킨을 기념하여 조성된 푸시킨스카야역의 한쪽 구석에서 앉아 있는 시인은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귀가하는, 평범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유명한 시로 위로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러워지나니
(중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국민시인 푸시킨을 기념하여 조성된 푸시킨스카야역.  승강장 끝쪽에 자리잡은 시인의 발 밑에는 시민들이 헌정한 꽃들이 있었습니다.
 국민시인 푸시킨을 기념하여 조성된 푸시킨스카야역. 승강장 끝쪽에 자리잡은 시인의 발 밑에는 시민들이 헌정한 꽃들이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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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6년 12월말부터 약 1년간의 여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러시아, #지하철,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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