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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천의 소중한 근대산업유산인 애경사(1930년대 세워진 애경 비누 공장) 건물이 처참하게 파괴됐다. 그동안 공공(公共)에 의해 파괴된 인천 근대유산 현장을 돌아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대응책을 모색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다."

민운기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간사의 말이다.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는 지난 10일 '공공에 의한 근대유산 파괴 현장 순례'를 진행했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중구 도원동 인천시립수영장 앞에 집결한 참가자들에게 민 간사는 "오늘 여러분이 보실 파괴의 현장을 잘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날 현장 순례 길라잡이로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컴팩스마트시티부장이 함께했다. 배 부장은 순례를 하며 근대건축물의 의의와 파괴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날 순례에는 시민 20여명이 참가했다.

근대건축물 철거, 도미노 현상 우려

조일양조장 본사 건물은 2012년 철거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일양조장 본사 건물은 2012년 철거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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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는 인천시립수영장에서 시작했다. 이곳을 시작점으로 잡은 이유를 배 부장은 "이곳이 공공이 (근대 건축물을) 처음 파괴한 현장이다. 그때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을 때였고, 건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고 설명했다.

수영장을 짓기 전에 이곳은 소주를 만들었던 아사히 양조장(공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인천에는 양조장이 많았다. 배 부장은 아사히 공장 소주는 인천을 대표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했다. 현재 송월아파트 자리에는 청주를 만든 공장이 있었고, 이 두 공장을 병합해 조일양조장이 만들어졌다. 아사히 공장은, 해방 후 1960년부터 건물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수영장을 만들면서 철거됐다.

일행은 '구(舊) 조일양조장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곳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2012년까지 아사히 양조장 본관 건물이 있었다.

배 부장은 "주민들이 빨리 주차장을 만들자고 구청에 민원을 넣었는데, 그게 근대문화재를 철거하고 주차장을 만든 신호탄이 됐다. 그 후 상습적으로 근대건축물을 부수고 주차장을 지었다. 더 큰 문제는 도미노 현상처럼 근대건축물이 철거되고 있다는 거다"라고 개탄했다.

주차장 옆에는 새로 지은 3층짜리 연립주택이 보였다. 배 부장은 그곳에 일본식 관사 건물이 있었는데 아사히 양조장 본사 건물이 철거되면서 같이 철거됐다고 설명했다.

"근대건축물들이 보존된다면 볼품없는 건물에 살고 계신 분들도 철거해야겠다는 생각을 덜 하게 된다. 그런데 공공기관에서 철거를 주도하면서 주변 근대건축물에 살고 계신 분들도 철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차장 앞 건물도 1950년대 건물인데 조만간 철거될 것 같다."

배 부장은 표지석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이곳이 양조장 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조장 터는 수영장 건물이 있는 곳이고, 주차장으로 변한 이곳은 본사 건물이 있던 곳인데 중구에서 역사적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표지석을 세웠다."

일본식 가옥 나가야(장옥) 보존해야

중구 신흥동의 나가야(장옥). 인천에서 가장 긴 나가야다.
 중구 신흥동의 나가야(장옥). 인천에서 가장 긴 나가야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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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동 신흥시장 맞은편에 소양구이와 양곰탕을 파는 '골목집'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이 있다. 그 건물이 1902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부도유곽(敷島遊廓)'이라는 이름의 집창촌이다.

'부도루(敷島樓)'라는 특별 요릿집이 호황을 누리면서 아예 행정지명을 부도정(敷島町)이라 했다. 1929년에는 부도루 외에 송산루·일력루 등, 점포 9개가 성업 중이었고, 창기 수가 7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주요 고객이 일본인에서 미군과 연합군으로, 행정지명이 부도정에서 선화동으로 바뀌었을 뿐 부도유곽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집권한 군사정부가 사회정화차원에서 선화동 유곽을 숭의동(옐로 하우스)으로 이전시켰고, 유곽이 있던 자리에는 시장이 들어섰다.

배 부장은 "지금은 두 곳 정도만 남아있다. 이 건물은 1945년 항공사진에도 나와 있다. 80여 년 된 건물이다"라고 설명했다.

부도유곽을 지나 일본식 주택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 이르렀다. 지붕 하나에 담을 나눠 가가호호 살고 있는 가옥형태로 줄사택이라고도, 장옥(長屋)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어로 나가야라고 한다. 길라잡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붕을 보면 차이가 나게 색깔 등이 다르지만 긴 건물이 하나의 지붕과 하나의 보로 연결됐다. 장옥이라고 하는 이 주택은 신흥동에 많이 있다. 인천에 남아있는 나가야 중 이것이 가장 길다. 이것과 비슷한 게 부평의 삼릉 미쓰비시 사택이다. 미쓰비시 사택은 노동자들을 위해 지었는데, 이 나가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파트처럼 일반인들에게 집을 지어서 팔기 위해 지었다. 일본식 주택의 특징은, 일본이 지진이 많은 나라라 높지 않고 일자로 짓는다. 한 지붕 아래 여러 세대가 같이 산다. 이 근대건축물은 보존가치가 높다."

주차장, 만들수록 더욱 모자라

신포동 동방극장 터로 걸음을 옮겼다. 일제강점기 낙우관으로 시작해 1938년에는 동보영화관으로, 해방 후 1947년에는 동방극장으로 개칭한 이 극장은 애관극장과 더불어 인천 영화관의 쌍두마차였다. 특히 동방극장은 외화를 많이 상영해 1960~70년대 '대부'나 '에덴의 동쪽' 등을 봤던 세대에게 추억의 장소다.

동방극장은 연기자 최불암에게 뜻 깊은 공간이기도 하다. 최불암의 부친인 최철은 건설영화사를 설립해 인천지역 최초의 극영화인 '수우(愁雨)'를 제작했는데 개봉을 앞두고 과로로 사망했다. 동방극장에서 영화가 개봉한 날 최철의 외동아들인 최불암은 8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시사회에 참석했다. 최불암의 모친은 동방극장 지하에 음악다방을 열기도 했다.

1981년 폐관한 동방극장은 그 후 여러 상점으로 쓰이다 2015년 철거됐고, 그 자리에 주차장이 지어졌다.

배 국장은 "인천에 역사와 사연이 있는 공간들이 하나둘 허물어져갔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여지없이 주차장이 들어선다. 서울 중구와 인천 중구 중에 어디에 더 주차장이 필요할까? 서울 중구에는 주차장이 별로 없다. 왜냐면 대중교통이 발달돼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은 지으면 지을수록 더 부족하다. 더 이상 주차장을 짓기 위해 근대건축물들이 철거되는 안타까운 일이 없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세관창고 복원, 좋은 사례

 철거 위기에 놓인 세관창고 건물이 협의를 거쳐 이전 복원됐다. 민ㆍ관이 지혜를 모은 좋은 사례로 기억된다.
 철거 위기에 놓인 세관창고 건물이 협의를 거쳐 이전 복원됐다. 민ㆍ관이 지혜를 모은 좋은 사례로 기억된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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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항동의 인천세관에는 건축물 2동과 창고건축물 1동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사무소 건축물 2동은 각각 선거계(船渠係)와 화물계(貨物係) 사무실로 1919년 5월과 4월 신축됐다. 창고 건물은 1911년 항동1가에 세관 청사와 함께 신축된 이후 1926년 항동7가로 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관 창고 주변에는 다른 창고 2동도 있었는데 2010년 수인선 지하출입구 공사과정에서 철거됐다. 세관 창고도 철거될 위기였지만 창고를 보존해야한다는 지역사회와 문화계의 요청으로 인천시는 해체 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조건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세관 창고가 지하철역(신포역) 출입구에 있었다. 지하철역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철거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근대건축물을 보존해야한다는 시민사회단체의 의견도 있었다. 당시 인천시 담당 국장, 코레일 사장, 시공사 사장 등 3자가 만나 이전·복원에 합의했다. 지하철역 출입구는 어쩔 수 없이 철거하되 지하철역 입구를 창고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그 때 인천의 희망이 보였다. 물론 이전·복원이 능사는 아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부득이한 경우, 이런 방법도 있다는 좋은 사례로 남아있다."

배 부장의 설명에 순례 참가자 중 한 명이 "애경사도 복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고. 이에 배 부장은 "이 창고는 건물 실측을 다 해서 복원했다. 그런데 애경사는 실측할 틈도 안 주고 철거해 내부 구조도 전혀 모른다"라고 답했다.

인천시는 등록문화재 잘 홍보해야
   
 수인선 신포역 지하철역 입구를 100여년 된 근대건축물 모형으로 만들어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수인선 신포역 지하철역 입구를 100여년 된 근대건축물 모형으로 만들어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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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고등학교 옆에 있는 기상대에 갔으나 주말에는 개방하지 않아 들어가지는 못했다. 1905년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꼭대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기상관측소가 세워졌다.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 해군이 관측소를 지은 것이다. 풍랑이나 기후 등 바다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인천관측소로 불리다 해방되고 국립중앙관상대로 바뀌었다. 1953년 중앙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그 기능이 축소돼 인천관측소로 개칭됐고 1992년에 다시 인천기상대로 승격했다. 배 부장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상대가 2013년 개축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철거된 건물이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인천사람들은 기상대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있다. 당시 이곳으로 소풍을 많이 왔다고 한다. 기상대 창고건물은 보전됐는데, 그 외는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로 지었다. 사실 2000년 이전에 헐린 근대건축물이 훨씬 많다. 2000년 이후 근대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늘고 등록문화재라는 게 생겨나면서 철거되는 근대문화재에 대해 시민사회에서 관심이 많아졌지만, 계속 철거되고 있다."

등록문화재란 지정 문화재(국보·보물 등)가 아닌 문화재 중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 지난 것으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해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문화재 중에 선택받은 게 지정 문화재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유물이 4만점 있는데 지정된 건 10점이다. 나머지는 문화재가 아닌가? 지정이 안 돼 관심을 안 갖고 있을 뿐이다. 국보나 보물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지정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지금 헐리고 있는 것들은 전부 지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빈틈으로 인해 파손·훼손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등록문화재다.

지어지거나 생산된 지 50년이 된 동산·부동산 문화재는 소유자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신청할 경우 국가에서 등록문화재로 등록해준다. 지정 문화재가 되면 자유롭게 매매도 안 되고 개인의 재산권에 침해를 받는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는 매매도 자유롭고 수리나 보수할 때 국가에서 지원도 해준다. 2001년부터 등록문화재를 시행하고 있는데 광역시·도 17개 중 등록문화재가 가장 적은 곳이 세종시와 울산에 이어 인천이 꼴찌에서 세 번째다. 근대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등록문화재인데 근대문물이 풍성한 인천의 등록문화재가 7개다. 무슨 얘기냐면,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은 것이다."

애경사 건물 철거를 교훈삼아야

중구는 애경사 건물을 허물고 부지 바닥까지 파헤쳤다.
 중구는 애경사 건물을 허물고 부지 바닥까지 파헤쳤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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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순례의 마지막 코스인 애경사 건물터로 이동했다. 민운기 간사는 또 와보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5월 30일 처음 철거했을 때 대부분 철거되고 5분의 1 정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이라도 어떻게 해볼 요량이었는데, 나머지를 또 파괴했다. 그래도 장소성이라도 살려볼 생각으로 6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장소성·역사성·공공성을 위해 주차장이 아닌 공공의 공간으로 남겨지길 바랐는데, 오늘 와 보니 바닥까지 다 파헤쳐 철거했다.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오늘 순례를 하면서 느낀 게 비슷할 거다. 애경사 철거를 교훈삼아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처절하게 느끼고 공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길라잡이로 수고한 배성수 부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건물이 사라진 게 굉장히 아쉽다. 우리가 진즉에 시정부에 등록해달라고 해야했는데 학계나 시민단체나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해 논의할만한 구조가 없었다. 2011년 세관 건물 이전이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기회를 놓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까 오면서 봤겠지만 아끼고 보존해야할 건물이 많다"고 한 뒤 "지역사회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인천만의 근대문화재 보호방안을 공론화하자는 의견이 많은데, 구체적으로 추진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순례에 참가한 한 시민은 "이렇게 근대자원이 많은 곳에서 지금까지 왜 논의가 없었는지 궁금하다. 세상이 바뀐 것 같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이렇게까지 행동했다면 결정권자도 의견을 수렴해야하지 않을까" 하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애경사, #나가야, #세관창고, #인천 중구, #근대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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