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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과학 영재반 시험 한번 볼까요?"

한국에 돌아온 지 2년이 지날 무렵, 중학생이 된 큰아이가 영재반 시험을 보겠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등 떠밀지 않아도 본인이 제 발로 고생해 보겠다는데. 그런 아이의 용기에 칭찬을 못 할망정, 엄마인 내가 대뜸 한다는 소리, "네가?"

타고난 영재? 맞춤형 영재?

운 좋게도 큰아이는 과학 영재반에 뽑혔다. 들인 것 없이, 거저 얻은 타이들, 영재! 이 얼마나 값진 이름인가? 내심 아이가 기특했다. 부모의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니 그 또한 우스웠다. 무슨 영재인가 싶었다. 영재라는 이름을 정확한 검증 없이 너무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시험응시자의 결과를 놓고 서열을 매긴 것에 불과한 것을...

학교에서 영재입학식을 치르고, 아이가 학교에서 공짜로 받았다며 책 한 보따리를 꺼내 놓았다. 가져온 교재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교재의 두께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낱권으로 된 개론서 수준의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책들이었다. 그 책으로 아이는 매주 토요일, 4시간씩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받으며 주말 오전을 보냈다.

그때야 비로소 영재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모가 자녀를 특목고, 특히 과학고에 보내고 싶으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에 돌입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과학고 입학을 목표로 한 경우 교육청 과학영재 과정은 필수(2011년 기준)이며, 그 영재교육시스템에 아이를 넣기 위해, 난이도 높은 수학, 과학문제를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들이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일들을, 나같이 평범한 '문과형' 엄마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이도가 그렇게 높다는데, 그 문제들을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소화해 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우리나라 영재들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나라에 그런 영재들이 많이 태어나는 것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뜻을 품은 부모들의 열성과 아이들의 노력으로 맞춤형 영재가 탄생되고, 또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 특목고로 직행한다는 현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독일 교육은 결코 억지로 영재를 만들어가지 않았다. 타고난 능력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끄집어 낼 뿐이었다.
 독일 교육은 결코 억지로 영재를 만들어가지 않았다. 타고난 능력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끄집어 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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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육은 결코 억지로 영재를 만들어가지 않았다. 타고난 능력을 적절하게 자극하며 끄집어 낼 뿐이었다.

"아이가 무엇이든 새로 배우려 하고, 한번 가르쳐주면 좀처럼 잊어버리질 않아요."

우리 아이들 얘기면 좋겠지만… 니오니(Lionie)라는 큰아이 친구 얘기다. 니오니의 엄마는 아이의 남다른 학구열과 습득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 아이는 네 살에 글을 떼고,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한 소위 '영재'다. 유치원 과정에서 전혀 학습을 안 시키는 것이 통례인 이곳에서, 네 살에 글을 뗀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지 한 두어 달 쯤 됐을까? 조기 입학을 했음에도, 여전히 니오니에게 수업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앞 회에서 얘기한 것처럼 독일의 교육 속도는 거북이보다 더 느리다. 1학년 독일어 국어시간엔 반복적으로 철자를 익히는 게 전부인데, 이미 글을 줄줄 꿰고 있는 니오니에겐 그보다 지루한 시간이 없는 게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 부모를 불러, '월반'(越班·성적이 뛰어난 학생을 상급 학년으로 진급시키는 제도)을 제안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니오니는 입학 두어 달 만에 2학년이 됐다.

우리나라 부모 같으면, 꽤나 자랑스러워 하며 동네방네 소문도 낼 일. 하지만 니오니 부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다시 1학년으로 눌러 앉혔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아이의 사회성과 적응력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쉽게 말하면 "2학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였다.

'월반'과 '낙제' 제도, 만약 한국이었다면...

이 월반제도는 중·고등학교까지 계속 적용된다. 전 과목 평균이 일정 수준이상이면 월반이 가능하다. 이것은 선택사항 내지는 권고사항일 뿐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경우 빨리 진급시키는 것이 해당 아이의 학교 적응을 위해 필요하고,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계적인 훈련과 반복학습을 통한 암기적 요소는 일체 배제된다.

대부분의 독일 부모가 이런 월반이라는 학교결정을 마냥 환영하지는 않는다. 이것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특히 초등학생의 경우는 그런 경향이 짙다. 초등학교 3학년에 영재성이 발견된 또 다른 학부모 역시 월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부하였다.

"우리 아이가 남들 보다 빨리 가는 것이 오히려 조심스러워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 속에서 소통하며 건강하게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지적인 부분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사회성이 뛰어난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맞는 말이다. 교육의 목표는 성장이다. 지·정·의가 조화를 이룬 건강한 성장 말이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영재는 학교 교육과 수업 현장에서, 교사의 관찰과 평가로 조심스럽게 발굴되었다. 그리고 월반이라는 제도를 통해 학교교육에 흡수되었다. 훈련과 반복을 통한 맞춤형 영재가 아닌 타고난 영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존중해 나갔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영재는 학교 교육과 수업 현장에서, 교사의 관찰과 평가로 조심스럽게 발굴되었다. 그리고 월반이라는 제도를 통해 학교교육에 흡수되었다. 훈련과 반복을 통한 맞춤형 영재가 아닌 타고난 영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존중해 나갔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영재는 학교 교육과 수업 현장에서, 교사의 관찰과 평가로 조심스럽게 발굴되었다. 그리고 월반이라는 제도를 통해 학교교육에 흡수되었다. 훈련과 반복을 통한 맞춤형 영재가 아닌 타고난 영재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존중해 나갔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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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재수라니!

독일 교육제도에는 월반도 있지만 낙제제도도 함께 존재한다.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적용된다. 기준 미달이면 가차없이 '낙제'를 시킨다. 전 과목 평균이 기준점 미만이면 상급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고 강제사항이다. 즉 능력이 되면 선택적으로 올라가고, 능력이 안 되면 일 년 늦더라도 해당 학년의 내용을 익히고 가게 한다.

학기말이 되면, 담임교사는 성적이 시원찮은 학생에 대해 1년의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하도록 학교의 입장을 전달한다. 아직 어린 나이에 시기를 놓쳐 못 배우고 넘어가는 것보단, 낙제를 해서라도 배울 것을 정확하게 알고 가게 하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모 된 입장에서야 이런 통보를 받으면 당연히 속상하고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급학년에서 나타나는 학습 부적응을 막기 위한 조치임을 익히 알기 때문에, 부모들 대부분은 그런 권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 연재된 글을 기초로 하였습니다.



태그:#독일교육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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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키일대학(Christian-Albrechts-Universitat zu Kiel)에서 경제학 디플롬 학위(Diplom,석사) 취득 후 시골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독일 교육과 생활의 경험을 담은, 독일 부모는 조급함이 없다(이비락,2021)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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