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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 지친 어느 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집어든 책 한 권이 저를 지옥에서 구해줬습니다. 작가의 한 문장에 고민이 풀리고 고뇌가 치유됐습니다. 아플 때 '약'이 돼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아이는 놀라울 속도로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 같은 걸 만들어갔다.
 아이는 놀라울 속도로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 같은 걸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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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만 2살 즈음부터 노래를 불렀다. 서툰 발음으로 음계에 맞춰 각종 동요를 따라 부르는 아이를 볼 때면 기분 좋은 상상에 빠지곤 했다.

'나중에 기타 하나 들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혜성 같은 신예로 주목받는 거 아냐...?'

하지만 아이의 재롱이 즐거운 딱 그만큼 나날이 커지는 아이의 자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아이는 놀라운 속도로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 같은 걸 만들어갔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점차 명확해졌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이뤄내고자 떼쓰는 날이 늘어갔다. 자기 몸에 붙은 팔을 어떻게 가누는지도 몰랐던 아이는 그렇게 보통의 사람으로 자라는 중이다.

문제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정면충돌할 때다. 특히 밤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난 어떻게든 아이를 오후 10시 전에 재우려 한다. 그때 잠들어야 성장기에 필요한 수면 시간을 채울 수 있고, 그래야 나도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은 다르다. 맞벌이하는 부모와 떨어져 있던 하루를 보상받고 싶은 눈치다. 밤 10시를 훌쩍 넘어서까지 인형놀이, 주방놀이, 영웅놀이, 점프놀이, 책 읽기를 한바탕 해도 안 잔다고 떼쓴다.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온 내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전부 불을 꺼버린다. 그제야 아이는 아랫입술을 잔뜩 앞으로 내밀고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나의 일방적인 태도에 화가 쌓일 대로 쌓여 있었나 보다. 여느 때처럼 강제로 아이를 안방까지 끌고 온 어느 날이었다. 잠옷 바지로 갈아입히려는데 아이가 싫다며 떼를 썼다. 좋은 말로 타일러도 맹렬히 뻗댔고, 남편이 힘으로 제압해 입히려 하자 발길질까지 하며 저항했다.

내가 나서야 끝날 것 같았다. 아이에게 모질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는 건 마음 약한 남편보다 내가 더 잘했다. 남편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 아이를 내 팔다리로 감싸 꼼짝 못 하게 가두고서 말했다.

"밤에 추우니까 바지 입고 자야 해. 바지 입는다고 해야 놔줄 거야."

아이는 더 악을 쓰고 울며 빠져나오려 몸부림쳤다.

서로가 바닥난 힘으로 버티며 평행선을 달린 지 30분째. 시계는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고, 아이의 울음에선 쇳소리가 났으며, 내 팔다리는 남은 힘이 없어 바들바들 떨렸다. 참다못한 남편이 방으로 들어와 아이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고, 아이는 소파에 누워 울다 지쳐 잠들었다.

난 엄마로서 아이에게 바지를 입혀야 했다. 안방 벽을 타고 흐르는 외풍에 감기라도 들면 아이는 또 하루 세 번 독한 약을 먹어야 하고, 기침과 콧물 때문에 잠 못 이룰 거고, 엄마인 나는 미안함에 밤을 지새워야 할 테니까. 아이를 울렸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저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울컥 치솟아 오르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었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건데... 왜 엄마 마음을 몰라주니.'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엄마의 시선으로 레즈비언인 딸의 인생을 바라보는 소설 <딸에 대하여>
 엄마의 시선으로 레즈비언인 딸의 인생을 바라보는 소설 <딸에 대하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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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 같던 그때, 소설 <딸에 대하여> 속 엄마가 떠올라 멈칫했다. 극 중 인물인 엄마는 딸이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자식이 원망스러워서 괴로운 그 엄마의 모습이 꼭 나 같았기 때문이다.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부모가 아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를 상정해본 적조차 없던 때가 있다. 엄마 눈에는 언제나 자식이 예쁠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른다. 세상에 나온 아이가 엄마 젖을 찾아 물 듯 당연한 본능인 줄 알았다.

임신하고 나서 그 믿음을 더욱 실감했다. 내 몸속에 아기집이란 게 생겼을 때부터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고 아꼈다. 그 집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고, 머리와 팔다리가 자라고, 태동이 커질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를 향한 사랑이 점점 커져갔다.

막상 아이가 태어나자 그 믿음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내가 자야 하거나 먹어야 할 시간에 울면서 나를 찾았다. 나와 아이의 욕구가 충돌했지만 보호자인 나는 아이의 욕구를 먼저 선택해야 했다.

나도 푹 자고 싶고, 편하게 밥 한술 뜨고 싶다는 그 간절함에서 분노와 원망이 피어올랐다. '다른 애들은 6시간 통잠 자기도 한다는데 우리 아이만 왜 푹 못 자지?' 그런 감정을 눈치챌 때면 '엄마가 이래도 되나' 싶어 죄스러웠다.

그래도 아이가 가만히 누워만 있던 시절에는 '이렇게 맑고 순한 것 앞에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이가 뒤집고, 기고, 걷고, 말할수록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못된 감정들이 더 자주, 다양하게 튀어 올랐다. 나는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그런 나를 안 따라주고 제멋대로 구는 아이가 미웠다.

"딸애는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중략...)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딸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유도한 대로 자라지 않는 딸을 두고 극 중 엄마가 읊조린 말이다. 그녀는 통제 불가능한 자식에게서 두려움, 서운함, 배신감, 허무함을 느낀다. 바지 때문에 아이와 다투던 그 날, 나도 그랬다. 내 판단이 옳았다고 여전히 믿고 있지만 계속 울렸다가는 아이가 내게 질려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멈춘 것뿐이었다.

아이는 한번도 '나'인 적이 없었다

 나와 아이는 다른 사람이다. 개별의 존재가 모녀로 관계를 맺은 것뿐이다. (사진은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한 장면)
 나와 아이는 다른 사람이다. 개별의 존재가 모녀로 관계를 맺은 것뿐이다. (사진은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한 장면)
ⓒ 메가박스(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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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소설 중 엄마도, 나도 엇나간 믿음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닐까. 나에게서 비롯된 삶이니 내 삶처럼 아끼고 헌신해야 한다는 책임감, 아이를 좋은 길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줘야 한다는 확신, 아이와 나를 동일시하는 마음 말이다.

아이는 내게서 시작됐지만 내 배 속에서 나온 순간부터 '나'는 아니었다. 내 몸 밖 다른 존재라는 건 나와 한 몸이던 시절처럼 아이와의 관계를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뱃속에 있을 때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이 분명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게워내는 입덧에 시달렸고, 임신 막달에는 뱃속에서 뒤척이는 아이 때문에 새벽에 자주 깼다. 그때도 나는 아이의 삶을 제어할 수 없었다.

나와 아이는 다른 사람이다. 개별의 존재가 모녀로 관계를 맺은 것뿐이다. 취향이나 기질이 제각각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다투고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삶을 걸어온 배우자와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나와 다른 삶을 걸어갈 아이와도 울고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게 당연했다.

'빨리해', '고집부리지 마',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의 그런 말들이 내게 족쇄 같던 때가 있었다. 내게도 생각이란 게 있는데 왜 부모님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만 강요하려는 걸까. 그런 답답함 때문에 얼른 어른이 되기를 꿈꿨던 것 같다. 그래놓고는 나도 어느새 그런 부모가 돼 있었다.

소설에서 극 중 엄마가 교사로 일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오래전 자기 앞에 앉아 '애가 왜 이렇게 말썽만 피우고 엇나가는지 모르겠다'던 한 학부모를 떠올리며 말한다.

"아이는 점점 더 엇나가고 멀어질 거라고. 어떻게 해도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 줘야 했을까."

부모가 자식의 삶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조금은 내려놓기로 했다. 음악천재가 된 아이를 상상하는 건 내 자유지만, 부모로서 아이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아이는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대로 자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고작 바지 하나 때문에 티격태격하지만 나중에는 극 중 엄마와 딸처럼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일 수도 있다.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아이의 커가는 자아와 치열하게 대화하고 타협하고 맞춰가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육아일지도 모른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 지음, 민음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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