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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어른의 삶에 '당연히 있는' 구성요소이자 필수적인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어른의 삶에 '당연히 있는' 구성요소이자 필수적인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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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공화국', '연애의 시대'에 안녕들 하신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서른이 된다면'이라는 주제로 수업 과제가 나왔다. 스무 살이 되면 성숙하고 세련된 어른이 될 줄 알았던 시절이니, 그보다 먼 서른의 삶은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여우원숭이의 그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서른 살의 나는 집과 차를 소유하였으며 내 스타일의 남편도 있는(!) 커리어우먼이라고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은 어른의 삶에 '당연히 있는' 구성요소이자 필수적인 통과의례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거나 만나는 사람들은 다 결혼했고, 모두들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라는 말로 나의 성장을 가늠했으며, 생리통 때문에 앓으면 "나중에 아기 낳으면 없어진다"라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친척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삼촌이 한 분 있었지만 그는 '비혼의 가능성'보다는 '미혼의 비참함'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주 술에 취해 있었으며, 친척들은 가족이 없는 그를 걱정했다. 마치 그가 겪는 문제들이 결혼만 하면 사라지거나,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인하는 양.

드라마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조롱하고, 뉴스에서는 고독사의 공포를 부추겼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문학의 세계에서는 사랑받지 못해 미쳐버린 'B사감'이 남의 연애편지를 훔쳐보고 있었다. 토크쇼에 나오는 중년 이상의 연예인들은 모두 결혼했거나 사별했으며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반드시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1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비혼'이라는 단어가 '미혼'을 물리치고 공중파 뉴스에 진출하고, 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혼과 저출산, 그리고 개인주의자(라고 쓰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청년세대를 우려한다. 그러나 결혼공화국 또는 연애의 시대는 여전히 안녕, 안녕들 하시다.

인간은 원래 반쪽짜리도, 짚신도 아니다

5년 전, 나는 "남자친구 있으세요?"나 "왜 연애 안 하세요?"라는 질문에 지쳐 '비연애'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독립잡지 <계간 홀로 :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창간했다. 연애하지 않는 상태를 비정상적인 것, 어딘가 하자 있는 것, 어서 '솔로탈출'해야 하는 감옥처럼 여기는 연애지상주의에, 에라이 침이라도 뱉어보자! 연애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구분되는 문화적 코드이고 사회적, 역사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된다.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고, 그저 오래되었으며 '다들 하니까'라는 권위에 기댈 뿐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3포 세대'는 이 세 가지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해야 가능한 명명이다. 상황이 나아지면 당연히 할 거라고 믿는, 포기가 아닌 '하지 않음'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연애와 결혼이 오로지 이성애의, 비장애인의, 가임기의 인구에게만 허용되며 그 외는 배제한다는 기만은 싹 지운 채로.

동아시아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의 상대와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는 미신이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인간이 원래 둘씩 붙어 다니는 총체인간이었는데 신이 이를 찢어놓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헤드윅>의 넘버 'The origin of love'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이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는 것이 '사랑'이라고 노래한다.

한국 속담은 더 직관적이고 노골적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처럼 우리 사회는 이렇게 인간을 '세트'로 전제한다. 개인은 젓가락 한 짝처럼 불완전한 미완성품이기에, '세트'를 맞춘 자들만을 바람직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승인한다. 내 새끼손가락은 텅 비었고, 나는 반쪽이 아니고, 인간은 짚신이 아닌데 말이다.

'결혼 = 행복'이라면 가정폭력은 왜 발생하나요?

사람들은 너무나 손쉽게 연애와 결혼을 인간 생의 필수 요소로 규정한다. 연애/결혼하지 않는 사람의 하자를 확신하고, 하는 사람에게도 하자가 있다는 사실은 잊는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이 발생하는지 설명을 좀 해봐요 네?

세상에는 해로운/착취적인/불평등한/폭력적인 연애와 결혼이 존재한다. 연애와 결혼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고, 살면서 부딪치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모조리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그러니 부디, "그러니까 연애/결혼 해"라는 말로 누군가의 선택을 부정하거나 오롯한 1인분의 삶을 미완의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신성시와 낭만화를 걷어내는 일은, 우리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삶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폭력에 저항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행복은 결혼이나 연애와 결합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붙어 다니지는 않는다.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 사람마다 기준과 목표와 삶의 색깔은 다 다르다. 이 결정권을 남에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20대 중반에 나는 생각했다.

"연애하지 않아서 나는 불행한가?"

대답은 '아니오'였고, 그것은 세상이 나에 대해 하던 말과 달랐다.

내 스스로 나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 정의하면서 내가 소중히 하는 것과, 남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가치들이 물에 뜬 기름처럼 선명해졌다. 원하는 대로 살려면 결혼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결혼은 내 삶에서 빠졌다. 유학이나 워킹홀리데이 같은 선택들과 함께.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왜 결혼 안 해?" 한때는 구구절절 답했다. 그러나 그조차 나의 비혼을, 어떤 상태를 설득시킬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그만두었다. '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할 자유'는 오직 강요에 불과하다.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살면, 나의 선택이 온전히 자발적인 것이라고 믿고 나의 '하자 없음'을 증명하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비혼에서 자발과 비자발을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예측불허고, 누군가는 비혼을 이야기하다가 결혼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꿈꾸지만 미뤄지거나 안 하기도 하니까. 살다 보면 비혼은 그냥 결심하고 자시고 없이 자연스럽게 '유지'되거나 끝나기도 한다.

결혼이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선택이라면 비혼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지속하려는 선택이다. 혼자 사는 시민을 위한 제도나 시스템, 사회적 인식은 그 사람이 언젠가 결혼을 할지 말지 여부와 상관없이 '현재의 상태'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 이외의 공동체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하고 보호하는 '생활동반자법'  발의에 함께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한다.

오롯한 1인분의 삶, 나는 잘 지낼 것이다
 오롯한 1인분의 삶, 나는 잘 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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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지 않은 1인분의 삶, 그렇게 살 것이다

앞으로 비혼인 나는 많은 제도에서 소외되고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영원히 우선 순위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코 묻은 돈을 붓던 주택청약통장을 깼다. 누구와 살든 그 동반자가 남편이 아니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위협을 받아도 '남편'이 개입하여 해결해주지 않는 여자는 더 많은 시비에 걸릴 것이다. 사람들의 걱정처럼 언제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나는 더 많은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고, 공동주거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주거 모델을 고민해보고, 나를 잘 돌보고, 내 일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기기로 했다. 몇 년 전에는 함께 살 집을 사려고 친구들과 돈을 모아 정기적으로 로또를 사기도 했다. 현실적이지는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함께'인 미래를 상상하는 친구들과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사실 자체가 되게 좋고 따뜻했다. 그렇게 살 것이다.

고통받는 결혼한 친구들과 연대하며 제도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더 많은 비혼을 위한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을 요구하고, 새롭고 다양한 비혼 여성들을 드라마와 토크쇼와 영화에서 보여 달라고 아우성을 치면서. 나보다 어린 여성들의 눈에 띄는 비혼의 즐거운 예시가 되어서, '결혼하지 않아도' 죽거나 사라지거나 비참하거나 불행하지 않은 여자로 충실하게 늙을 것이다. 어떤 열일곱이 문득 자신의 서른 이후를 상상할 때, 결혼하지 않는 가능성에 한 오라기의 실이라도 더 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둘이어도 좋지만, 혼자여도 괜찮다. 나는 오롯한 1인분의 삶, 나를 성실히 먹이고 돌보고 기르며 나와 잘 지내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진송님은 <계간 홀로> 편집장입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저자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비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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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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