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복잡한 인간사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인 이상, 그 누가 완벽하게 선하고, 완벽하게 악할 수 있으랴. 착하고 다정한 나의 벗이, 낯선 이에겐 길을 알려주는 20초의 짬도 내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뿐인가. 나를 괴롭게 하는 저 인간이,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한 아빠이고 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악이 있다면,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절대악이란 것이 있다면, 그 악은 과연 처단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단하되 법과 원칙에 따라 단죄해야 할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와 <오리엔탈 살인사건>의 공범자들은 과연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잔소리꾼의 죽음> 책표지
 <잔소리꾼의 죽음> 책표지
ⓒ 현대문학

관련사진보기


<잔소리꾼의 죽음>은 해미시 맥베스라는 순경이 휴가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추리 소설이다. 과연 살인범은 누구일지 그 수사 과정에 집중해도 좋고, 사방팔방으로 뻗쳐가는 생각의 가지들을 따라가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야기 구성이 치밀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나 나름의 인간 탐구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해미시 맥베스는 로흐두 지역의 인기 있는 수호자였으나, 수사 과정의 실수로 경사에서 순경으로 좌천되고, 약혼자와의 파혼으로 뜬소문에까지 휘말린다. 따뜻했던 지역 주민들은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제기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이 마을의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왜 그가 죄의식을 느끼는 쪽이 되어야 하는가?" (p11)


그는 사랑했던 로흐두 지역에 신물을 느끼자, 그에게 등을 돌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 앤절라는 그에게 휴가를 떠날 것을 권한다. 그녀의 해결책에 내 마음도 동했다. 사람이든, 사안이든, 가끔은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때론 그것이 회피가 아니라,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평하는 건 당신답지 않아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봐요. 그러면 돌아와서 우리를 다시 보는 게 틀림없이 기쁠 거예요. 내가 장담해요." (p16)


그렇게 해서 도착하게 된 스캐그의 프렌들리 하우스. 첫 날부터 모든 투숙객의 신경을 긁는, 잔소리꾼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예의 그 '잔소리꾼' 밥 해리스가 등장한다. 공공연한 장소에서 아내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남자. 다른 사람에게도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상종 못할 무뢰한이다.

모든 투숙객들은 그를 향한 적의를 품는다. 누군가는 "그 해리스라는 남자는 총이나 맞아야 돼요."(p34)라고 말하고, 사람들은 그를 죽이는 것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기까지 할 정도.

그 지독한 잔소리꾼 덕분에 나머지 투숙객들은 쉽게 어우러진다. 해미시는 공통의 적개심이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결속시키는지, 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배척받게 되었음을 떠올린다.

어쩌다보니 해미시는 투숙객들의 리더 격이 되어 함께 어울리고, 일종의 연대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작은 일행을 계속 즐겁게 해 주겠다는 각오로 뭉쳐져 있었다. 그는 다시 특유의 느긋한 행복감을 되찾아 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고, 돌아온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p47)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해미시를 사로잡는다. 악독한 잔소리꾼 밥 해리스와 그에게 핍박당하는 아내 도리스, 그리고 그녀 곁엔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 앤드루가 있다.

"넌지시 그들을 보던 해미시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재앙을 불러 모으는 재료를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잔뜩 짓밟힌 아내, 고약한 남편, 다정하고 괜찮은 남자, 이 모든 것을 섞으면 무엇이 나오겠는가? 살인,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p49)


그리고 물론,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해미시는 민박집의 투숙객들 중 하나가 살인을 저질렀으리라 확신하며 수사를 시작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도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라는 것. 투숙객들 중 그 누구도 용의 선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각자가 품고 있는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하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얼개가 드러난다. 완벽해 보이는 부부, 그저 철부지 젊은이들로 보였던 이들, 고지식한 전직 교사 등 이들 각자가 품고 있는 비밀들은 무척 흥미롭다.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한 해미시는 영웅도,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살인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경찰에 협조할 때는 친구들을 배신하는 느낌을 갖기도 하고, 반려견의 죽음으로 지독한 슬픔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선량할 필요는 없지만, 해미시의 인간적인 면모는 책의 매력을 더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매우 흥미롭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찰임에도 갖은 하대와 성희롱마저 당하는 매기는, 그럼에도 그녀의 "안전하고 익숙한 세계"(p156)로 돌아갔을 때 기쁨을 느낀다. 그녀의 그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우리가 익숙함에 얼마나 길들어 버릴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해미시의 수사를 돕는 앤절라가 있긴 하나, 주요 캐릭터 중 바람직한 인물을 찾긴 힘들다. 매기는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여성성마저 이용하려 하며, 잔소리꾼 해리스의 악랄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내 도리스는 "남자들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그런 여자"(p316)로 그려진다. 덕분에, 인간의 본성을 더 생각하게 한다.

오랜만에 읽는 추리소설이었다. 작가는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서덜랜드의 자연"(p4)을 보며 살인 사건을 떠올렸다고 하니, 무엇인들 그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잔소리꾼의 죽음>은 해미시 순경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 시리즈물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매력적인 해미시 순경의 활약을 지켜볼 생각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어느 편에서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 역시 짜잔 하고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잔소리꾼의 죽음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현대문학(2018)


태그:#잔소리꾼의 죽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