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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남미 상사병을 오랜 세월 앓던 기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 대륙에 두 발로 딛고 선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번째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허리 격인 칠레의 산티아고. 현지인 친구 다니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염치없이 넙죽 받았겠다,  여행 초반은 순탄해 보인다. 남미 대륙 전체의 '민족의 대명절' 크리스마스도 어느새 지나고 새해 전까지 특별한 행사는 이제 딱 하나 남았다. 그것은 바로 기자의 25번째 생일인데. 친구 다니의 센스로 아마추어 와인 애호가인 기자는 생일을 와이너리에서 보내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포도송이 헤는 낮

- 송승희 개작
(원작; 고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친구의 차가 지나가는 벌판에는
포도나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이 양조장의 와인들을 다 마실듯 합니다

벌써 눈앞에 어른거리는 와인들을 종류별로
병나발을 불지못하는 것은 
쉬이 숙취가 오는 까닭이요
아직 밤이 남은 까닭이요
이제 더이상 스무살 같지않은 내 몸을 생각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포도 한송이에 시라즈(Shiraz)와
포도 한송이에 카버넷 사비뇽(Cabernet Sauvignon)과
포도 한송이에 멀롯(Merlot)과
포도 한송이에 피노 노아(Pinot Noir)
포도 한송이에 말벡(Malbec)
포도 한송이에 이 모든 레드, 레드 와인...

이 와이너리의 입구에 들어서면 포도나무들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있다.
▲ '코지뇨 마쿨(Cousino Machul)' 입구에서 이 와이너리의 입구에 들어서면 포도나무들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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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푸르른 들판의 포도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다함께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그리고 햇볕이 내리쬐면 다함께 건강한 잎사귀들을 흔들며 반짝였다. 친구 다니의 차는 지금 그 사이에 난 길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벌어진 입도 다물줄 몰랐다. 다만 문득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사로잡혀 있던 감상을 휴대폰 메모에 급하게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러다 감히 고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개사하고 말았다. 개사라기 보다는 코미디에 가깝긴 하지만 나름 그때의 감흥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다니의 고물차는 쿨럭쿨럭 기침이라도 하듯 먼지바람을 한바탕 일으키고 멈춰섰다. 현지 와인에 공부하는 기회도 가질 겸 내 생일도 축하할 겸, 겸사겸사해서 도착한 이곳은 칠레 최고 와이너리 중 하나인 '코지뇨 마쿨(Cousiño Macul)'. 다니는 와인을 별로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 특별한 날을 맞은 나를 위해 직접 운전사를 자청했다. 칠레는 세계 최대의 와인 생산국의 하나지만 그녀처럼 현지인들 중에 와인을 잘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생각해보면 한국인이라고 누구나 소주, 막걸리를 다 좋아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나는 실제로 소주를 너무 싫어해서 내 소주 주량은 겨우 '반잔'이다).

리셉션에 방문자 접수를 하고 방문자 카드를 건네받았다.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붐비는 것 같았다. 투어 비용을 이미 지불한 우리는 인파를 피해 가쪽에 서서 가이드가 오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귀를 귀울이니 스페인어와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 유럽 계통의 다양한 언어도 들리는 듯 하다. 이곳 와인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있다더니 와이너리 투어 상품도 그에 맞먹는 듯 하다.

얼마 뒤, 3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똑똑한 가이드 아가씨가 우리에게 당첨되었다. 그녀는 '잉글리쉬, 잉글리쉬!'를 연신 외치며 그녀 담당 방문자들을 한데 모았다.

우리는 둥글게 원을 만들어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휴가 중인 미국인 모자, 교환학생이라는 아일랜드 출신 훈남 삼인방, 영어도 못하면서 여기에 낀 의문의 브라질에서 온 한 커플 그리고 칠레 & 싸우스 꼬레아의 독특한 조합인 우리도 모두 이에 합세했다. 가이드 언니 포함 모두가 궁금해하는 바람에 우리는 1분짜리 인간극장을 상영하듯 우리의 우정에 대한 '썰'을 조금 풀어주었다(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라 이제 설명할 때 쓰는 일정한 레파토리가 있을 정도다).  그제야 모두들 만족스런 표정으로 견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의 찜질방 사우나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품종 수확과 파쇄를 거쳐 포도를 처음으로 발효시키는 발효실이다.
▲ 발효실의 오크통들 사이에서 우리의 찜질방 사우나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품종 수확과 파쇄를 거쳐 포도를 처음으로 발효시키는 발효실이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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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언니는 살인적인 땡볕을 피해 우리를 안으로 이끌었다. 제일 처음 도착한 곳은 알맞은 품종 수확과 파쇄를 거쳐 처음 발효시키는 '발효실'이다. 다니 방보다 더 큰 오크통이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두 줄로 쭈욱 늘어서 있다.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의 찜질방이나 목욕탕의 사우나를 다 연상시켰다. 그러고 보니 내부에 스팀만 좀 있으면 친환경 고급 스파같기도 하다. 그곳에서 '인생샷' 남기는 사람들을 기다려 다음 장소로 향했다.

압착실에서는 발효를 거핀 미완성의 와인을 압착시킨다.
▲ 양조장 압착실의 모습 압착실에서는 발효를 거핀 미완성의 와인을 압착시킨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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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발효를 거친 미완성 와인을 압착시키는 '압착실'. 발효실이 생각보다 전통적인 모습이라 놀랐다면 압착실은 좀 더 내가 생각한 모습에 가까웠다. 호주에 살적에 와이너리는 자주 방문해 보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가이드 투어까지 따라나선 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 계산적이고 정확한 연구가 필요한 실험실같은 곳일거라고 혼자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압착실은 전 방의 오크통과 같은 크기의 스테인리테스통이 한줄로 줄지어 서있다. 아래쪽에는 온도계를 비롯해 우주선 운전석처럼 복잡한 기계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잠깐 가이드 언니의 입에서 많은 숫자가 나온 듯도 하다. 나는 숫자만 많이 나오면 갑자기 영어가 안들리는 기현상을 겪는다. (왜 그럴까?)

숙성실에서는 발효와 압착, 정제의 과정을 거쳐 와인을 최상의 맛까지 끌어올린다.
▲ 숙성실의 내부 숙성실에서는 발효와 압착, 정제의 과정을 거쳐 와인을 최상의 맛까지 끌어올린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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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발효와 압착, 정제를 거친 와인을 최상의 맛까지 끌어오리는 숙성실로 향했다. 겨우 계단 좀 내려왔을 뿐인데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밖은 태양이 작열하는데 여기서의 내 팔은 닭살이 오소소 돋는다.

여기도 첫번째로 방문한 곳와 마찬가지로 오크통이 즐비했다. 하지만 겨우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사이즈가 훨씬 작다. 내게는 어릴적 즐겨하던 컴퓨터 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 해적편'에 나오는 작은 오크통을 떠올리게 한다. 적이 물풍선을 놓으면 이통 뒤에서 가슴 졸이며 물보라를 피하곤 했었다. 다니에게 킥킥대며 몸소 게임의 캐릭터처럼 시범을 보이니 그녀는 내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칠레 와인의 박물관이라고도 할수 있는 빈티지만 진열된 지하실의 입구의 모습이다.
▲ 빈티지가 전시된 지하실 칠레 와인의 박물관이라고도 할수 있는 빈티지만 진열된 지하실의 입구의 모습이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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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고 방향을 틀어간 곳은 소위 말하는 '빈티지'가 진열된 지하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먼지 더께가 높아 공기중에도 먼지가 풀썩인다. 그곳은 커다란 자물쇠로 몇 겹이 잠겨있다. 안에 진열된 와인의 생산연도와 품종을 늘여놓던 가이드 언니가 갑자기 뚱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좋은 와인을 만들어도 이건 우리 칠레사람들게 아니에요." 

"아니, 그럼 누구거라는 거에요?"

"이렇게 좋은 건 값을 높게 쳐 수출로 다 파는 거죠. 그래서 칠레와인 좋은건 외국인이 더 잘안다는 말도 있어요."

그녀의 이 발언은 모두를 깜짝 놀래게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오래전 보았던 JTBC의 <비정상회담>의 칠레인 패널, 로드리고를 떠올렸다. 그도 정확히 같은 말을 했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자 그녀는 모두를 리셉션으로 인솔했다. 테이블로 쓰는 작은 오크통 위에는 어느새 우리가 테이스팅할 와인들과 잔들이 준비되어 있다. 한시간이 넘게 견학을 하는 동안 모두들 발효된 포도에 지겹도록 코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렇듯 코로만 '테이스팅'하다가 마침내 혀로도 할 기회가 온것이다. 스파클링 하나, 화이트와 레드를 각각 3종류씩 시음해 보았다. 겨우 바닥만 적시는 호주 와이너리 시음과는 달리 이곳은 어찌나 인심이 넉넉한지 거의 반 잔을 채웠다. 운전을 해야 하는 다니는 레드로 넘어가기 전에 벌써 와인전을 내려놓았고 나는 취기가 오르면서도 '오는 와인' 마다하지 않았다.

가족으로 보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그늘아래에서 와인을 들기고 있다.
▲ 그늘 아래에서 한가롭게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 가족으로 보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그늘아래에서 와인을 들기고 있다.
ⓒ 송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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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작지만 목소리 하나는 우렁찬 가이드 언니는 가이드가 정말 천직인 듯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곳에서도 그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칠레의 와인 역사는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이민온 기술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으로 마케팅하기에는 당연히 떨어질수밖에 없단다. 그녀는 여유분으로 둔 잔에 레드 와인을 조금 따라 향을 맡고 한모금 넘겼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역사가 깊지 않다고 와인맛까지 깊지 않은건 아니에요. 우리가 가진 일교차가 큰 이상적인 자연환경과 저렴한 노동력이 가격대비 가장 좋은 와인을 만드는 거죠."

그녀가 말을 마치자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르고 서있던 우리도 이내 그 박수에 동참했다. 상기된 얼굴의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우리를 말렸지만 싫지는 않은듯한 눈치였다. 취기가 올라 물개처럼 박수를 치는둥 마는둥 하던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내 이름을 거듭 부르는 다니의 목소리만 귀언저리에서 웅웅댄다.

- 작년말 만 25번째 생일날,
'코지뇨 마쿨' 와이너리에서.


태그:#여행, #남미, #칠레, #와인, #미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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