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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에 이어, 이번에는 <신대방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원풍모방 노조 터 - ②세왕전기 터 - ③한영섬유 노조 터 - ④보라매공원 - ⑤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한국학생건국운동공적비 - ⑥김마리아 동상 - ⑦동작청소년성문화센터 '더하기'

서울시민의 아늑한 휴식처, 보라매공원

보라매공원은 서울 남부권에 위치한 대표적 시립공원이다. 동작구민은 물론 관악구민, 영등포구민 등 서울시민의 아늑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보라매공원 자리는 1958년 진해에서 이전한 공군사관학교가 1985년까지 세워져 있었다. 보라매공원에는 이곳이 공군사관학교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비행기 전시공간, 성무대(星武臺)라는 이름의 공군을 상징하는 탑과 호국비천(護國飛天) 탑 등이 대표적인 공군사관학교의 흔적이다.

1986년 5월 5일 개장한 보라매공원은 한때 양궁 대회가 열리던 곳이기도 했다. 88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 '신궁' 김수녕이 중학교 3년 때인 1986년에 혜성 같이 등장한 곳도 보래매공원이었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김경욱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비공인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곳도 보라매공원이었다.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 유세장면(1987. 12. 13) 김대중 후보의 보라매공원 유세를 계기로 보라매공원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집회 명소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는 보라매공원 유세를 통해 역전을 노렸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130만이 모인 이날 집회는 대한민국을 들썩였지만, 김대중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후보단일화 기회를 잃으면서 개표결과 3위에 머물렀다.
▲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 유세장면(1987. 12. 13) 김대중 후보의 보라매공원 유세를 계기로 보라매공원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집회 명소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는 보라매공원 유세를 통해 역전을 노렸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130만이 모인 이날 집회는 대한민국을 들썩였지만, 김대중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후보단일화 기회를 잃으면서 개표결과 3위에 머물렀다.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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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 선거의 추억 – 백기완의 제안과 김대중의 거부

보라매공원에서 대중 집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87년이었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이는 6월 민주항쟁이후 개헌이 이루어지면서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민중후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후보는 1987년 11월 29일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군정연장 종식을 위한 민주세력의 대연합을 촉구"하면서 "모든 노동악법과 반민주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민중후보 백기완의 보라매공원 유세는 참여 규모 면에서도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에게 민주연립정부 수립 방안에 기초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하면서 12월 6일과 12일 연이어 개최한 대학로 집회에서는 20만이 넘는 군중이 결집하는 대성황을 이룬다.

백기완 후보의 '민주연립정부 수립 방안에 기초한 후보단일화' 제안에 김영삼 후보가 호응했고, 재야대표도 참여하는 '4자회담'이 성사되는 듯했다. 하지만 '4자 필승론'('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4후보 구도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반드시 당선된다'는 주장)에 사로잡혀 있던 김대중 후보의 거부로 백기완 후보의 제안은 끝내 좌초하고 만다.

1987년 대선에서 보라매공원이 주목받은 사건은 백기완 후보의 유세가 아니라 12월 13일 열린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대규모 유세였다. 11월 29일 여의도 광장 유세를 통해 세몰이를 시도했던 김대중 후보는 이후 김영삼 후보와 노태우 후보의 잇따른 대규모 여의도 광장 유세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대선 막판 대역전의 발판을 만들고자 보라매공원 유세를 마련했다.

이날의 김대중 후보 보라매공원 유세는 겉으로 볼 때 무려 130만 명(주최 측 추산 500만 명)이 참석했고 그 열기 또한 대단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성공적인 집회였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후보는 "본인은 민통련 등 재야민주단체, 전국 수십 개 대학의 총학생회, 수천 명의 개신교 성직자와 신부, 스님, 문화예술인, 법조인의 지지를 받는 전국적인 단일후보"라고 주장하며, "본인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국민적 단일화를 이룩해달라"고 호소했다(동아일보, 1987. 12. 14).

이날 보라매공원 유세장의 열기도 대단했다. 유세장에는 수천 명의 상인도 몰려와 장사를 했는데, 바나나를 파는 한 상인은 양손에 바나나를 쳐들고 "기호는 3번, 바나나는 5백원"이라고 외치며 장사를 하는가 하면, 한 오징어 장수는 큰 오징어는 '평민당 오징어', 작은 오징어는 '민정당 오징어'로 분류해서 파는 등 참석자들과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되기도 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자 했던 참석자들은 유세가 끝난 후 신대방삼거리-장승배기-노량진역-한강대교를 건너서 서울역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이날의 보라매공원 유세를 통해 1987년 대선 정국에서 대한민국이 들썩이는 데 성공했지만, 부작용도 생겨났다. 최근 이희호 여사가 자서전 <동행>에서 회고했듯이 엄청난 군중이 운집한 데 흥분한 것이 김대중 후보에게는 독이 되었다. 후보단일화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결국 대선 개표 결과 김영삼 후보에게도 뒤진 채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보라매공원, 집회 명소로 자리 잡다

이후 보라매공원은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집회 명소로 자리 잡는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4·26총선을 앞둔 1988년 4월 5일 민주당(김명윤 총재직무대행)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등 5공비리 규탄'을 위해 개최하려던 <합동의정보고회>를 '장소가 도심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시일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취소한 것이다.

1989년 4월 30일에는 여의도광장에서 열기로 한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연세대로 옮겨 진행하는 동안 보라매공원에서는 전국의 월남참전 퇴역군인과 그 가족 1만 5천여 명이 모여 <전국 파월용사 만남의 광장> 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1989년 8월 8일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한 평민당의 <공안통치 저지 및 민주정치 회복을 위한 시국대강연회>가 열리면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집회 명소로 부활한다. 이날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공안통치의 즉각 중단, 5공청산과 중간평가 중 택일' 등을 주장하며 노태우 정권을 압박했다. 이날 집회 참석자들은 "안기부 해체, 5공청산"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영등포로터리까지 행진을 벌였다.
 
<공안통치 저지 및 민주정치 회복을 위한 시국대강연회> 소식을 알리는 한겨레신문 1989년 평민당의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수십만이 참석하는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노태우정권의 공안통치에 맞섰다.
▲ <공안통치 저지 및 민주정치 회복을 위한 시국대강연회> 소식을 알리는 한겨레신문 1989년 평민당의 김대중은 보라매공원에서 수십만이 참석하는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여 노태우정권의 공안통치에 맞섰다.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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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가 벌어진 보라매공원에는 당국의 불인정으로 해직 등 탄압을 받고 있던 전교조 교사들이 <전교조지지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9년 11월에는 보라매공원에서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한국노총이 주최하는 노동 집회(5일)는 당국의 허가 속에 3만여 명이 참석하여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의장 단병호)가 주최하는 노동자 대회(12일)는 당국의 불허와 원천봉쇄 속에 서울대로 옮겨 진행됐다. 

그곳에서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철폐 및 전노협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강행하다가 무려 1585명이 연행되고 5명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국회의는 "당국이 노총의 집회는 허가하면서도 우리의 평화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형평을 잃은 처사"라고 비난했고, 17일에는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총회 형식의 시한부 총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과 보안사 사찰규탄 국민대회

새해 벽두부터 3당 합당(민정당, 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으로 정국이 요동친 1990년에는 보라매공원에서 대규모 집회가 두 차례 열린다.

우선 7월 21일에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여당 민자당에 맞서 평민당과 민주당, 통추회의 등 범야권과 국민연합 등 재야세력이 공동으로 <민자당폭거규탄과 의원직 사퇴결의 및 총선촉구 결의대회>를 연다. 이날의 집회는 6공화국 들어 최대 인파인 50만 명이 참석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는데, 일부 군중은 집회가 끝나고 한강대교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집회를 공동개최한 평민당, 민주당, 통추회의 등 범야권은 거대여당 민자당에 맞서기 위한 야권통합을 결의 했다.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20여 만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평민당, 민주당, 민중당 등 야당과 재야가 함께하는 확대비상시국회의의 <보안사 사찰규탄과 군정청산 국민대회>가 보라매공원에서 열린다. 이날의 집회는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한 데 따라 마련된 집회였다.
  
윤석양 이병의 폭로를 계기로 열린 보라매공원의 보안사 해체 촉구 집회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자료를 폭로하였다. 이때 보라매공원에서는 20여만이 참석한 대규모 규탄집회가 열렸고, 수배중인 윤석양 이병을 대신하여 누나 윤석례 씨가 참석하여 보안사를 규탄했다.
▲ 윤석양 이병의 폭로를 계기로 열린 보라매공원의 보안사 해체 촉구 집회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자료를 폭로하였다. 이때 보라매공원에서는 20여만이 참석한 대규모 규탄집회가 열렸고, 수배중인 윤석양 이병을 대신하여 누나 윤석례 씨가 참석하여 보안사를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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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가 출신 윤석양 이병은 보안사 서빙고대공분실에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복무하던 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자료 디스켓 30장과 관련 서류를 들고 탈출하였다. 그가 폭로한 민간인 사찰 자료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정치인과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등 종교인을 포함하여 1303명의 사찰 색인표도 있었다.

보안사가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1989년 3월에 친위쿠데타 계획 하에 '청명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계엄 선포와 함께 체포할 반정부인사의 목록을 만들어놓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확인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분노한 군중들 중 4만여 명은 "보안사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방역까지 행진을 벌이다가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기도 했다.

최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 혁명 당시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문건이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계획을 수립했다는 그 기무사의 전신이 바로 보안사였다. 보안사는 윤석양 이병의 폭로를 계기로 '반성한다'면서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 보안사에서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결국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된 셈이다.

한편, 보라매공원에서는 1991년 <수서비리 진상폭로 및 분리선거음모 규탄 국민대회>,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 밀실협상 규탄 및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와 쌀 생산비 보장 등을 촉구하는 <전국농민대회>, 삼성의 승용차산업 진출 허용을 규탄하는 <자동차업종 노동자대회> 등이 연이어 열리며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김대중과 김영삼, 보라매공원에서 벌어진 세기의 대결

1995년에는 보라매공원에서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도 열린다. 해방된 지 50년을 맞는 해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민족공동행사가 보라매공원에서 열렸다는 사실 역시 보라매공원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민주노조로 거듭난 KT노조가 무려 3만의 조합원이 참여한 파업결의대회를 보라매공원에서 개최하여 김영삼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전복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은 해도 1995년이었다.

그런데 1995년에 열린 보라매공원 집회의 정점은 12월 3일에 열린 새정치국민회의(총재 김대중)의 <5·18 진상규명과 대선자금 공개 촉구 비상시국대강연회>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5.18 진상규명을 위한 보라매공원 집회 1995년 김대중과 김영삼은 5.18진상규명을 둘러싸고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 5.18 진상규명을 위한 보라매공원 집회 1995년 김대중과 김영삼은 5.18진상규명을 둘러싸고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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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내내 벌인 '80년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활동은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를 시작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만, 이후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야를 중심으로 5·18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고발이 잇따르고 1995년에 이르러 '5·18특별법 제정'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면서 정치권에서도 마냥 이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의 검찰(주임검사 장윤석 공안부장)은 7월 18일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 58명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워 전원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다. 이때 장윤석 공안부장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누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되자 검찰의 '5·18불기소 처분이 옳은가'에 대한 헌법소원이 있었고, 헌법재판소는 심리 끝에 "성공한 내란도 처벌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리려는 상황을 집회 직전 연출하고 있었다.

이때 라이벌 김대중에게 결코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승부사 김영삼은 11월 24일 "5·18특별법 제정"을 민자당에 전격적으로 지시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한다. 다만, 김대중이 강조하는 특별검사제 도입은 불가하다는 입장도 분명히 한다. 더군다나 김영삼은 집회 전날 전두환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였고, 이를 거부한 채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간 전두환을 집회 당일 아침에 전격 구속함으로써 '김 빼기 전술'도 성공적으로 구사한다. 김영삼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는 노태우 비자금 파문으로 떠오른 1992년 당시 대선자금 공개라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피해보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라매공원 집회는 10여 만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예정대로 개최되었고,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김대중은 이날 집회에서 김영삼에게 대선자금 공개를 압박하는 한편, 군중들 앞에서 "5·18의 진상 규명을 위해 특검제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포효했다.

5·18의 진상규명을 위한 보라매공원 집회 전후 벌어진 김대중과 김영삼의 세기의 대결은 1971년 대선 이래 형성된 영원한 라이벌의 또 다른 한 판 승부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집회 명소, 이제는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으로
  
민주노총의 보라매공원 집회 민주노총은 1996년 5월 1일 <106돌 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를 보라매공원에서 개최하였다.
▲ 민주노총의 보라매공원 집회 민주노총은 1996년 5월 1일 <106돌 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를 보라매공원에서 개최하였다.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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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공원에서는 1996년에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주최한 연초의 <96 전국농민대회>에 이어 민주노총이 주최한 <노동절 106돌 기념 노동자대회>, 전교조의 <전교조 결성 7돌 기념 전국교사대회> 등이 잇따라 열린다. 여기에 5월 26일에는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민련이 손을 잡고 <부정선거와 야당파괴 규탄 4·11총선 민의수호 결의대회>도 열리는데, 김종필이 장외투쟁에 나서 연설한 '어색한' 장면은 1997년 대선에서 위력을 발휘한 DJP연합의 리허설이었다.

보라매공원에서는 1998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의 <98 전국농민대회>, 1999년 한국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 등이 잇따라 열리고, 2000년대 들어서도 노동자, 농민, 대학생들은 물론 의사들의 집회도 계속 이어진다.

2001년 '공직사회 개혁과 공무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동 상임대표 차봉천)가 주최한 <공무원 노조결성 및 공무원 노동3권 쟁취 전국공무원가족한마당>은 공무원노조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벌어진 보라매공원의 집회는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을 뒤흔든 보라매공원'의 위력을 재현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대응하여 미국의 사과를 요구한 촛불집회를 계기로 대한민국을 뒤흔든 집회 명소의 지위를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에 내놓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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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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