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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이사를 하며 이 방 저 방 널려 있던 책들을 오랜만에 정리했습니다. 책장에 한 권씩 꽂다 보니 책들과 얽힌 여러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책 소개가 아닌 책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쓰는 글입니다. - 기자말

헌책방이 생각나는 날이 가끔 있습니다. 큰 건물 지하에 있는 기업형 중고서점 말고 길 걷다 만나는 허름한 헌책방,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고 책 먼지가 폴폴 날리는 그런 헌책방 말입니다. 대형 서점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서점들이 책 유통을 독과점하고 있지만, 헌책방만이 뿜어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가치가 제 발길을 잡아끌곤 합니다.

지난 주말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걸었습니다. 아니, 제가 헌책방 거리로 기억하고 있는 평화시장 앞 인도를 걸었죠. 오래전 이 거리에는 헌책방도 많았고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젠 그곳을 모자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랗게 펼쳐진 평화시장 1층에 들어선 헌책방은 대략 세어보니 10여 개뿐이었습니다. 헌책방들은 모자 가게들 사이에 가끔 한 곳씩 끼어 있었죠.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  헌책방 거리였던 서울 평화시장 1층에는 지금은 모자 가게가 더 많다.
▲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  헌책방 거리였던 서울 평화시장 1층에는 지금은 모자 가게가 더 많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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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책 구하러 나온 사람보다 책방 주인이 더 많았습니다. 마음 편하게 책을 구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혼란스러웠습니다.

간판도 혼란을 줬습니다. 분명 '동화책' 전문이라거나 '인문학' 전문이라고 쓰여 있건만 진열된 책들은 간판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가게 불문하고 수험 서적이 입구를 차지하고 있었죠.

"찾는 책 있나요?"

40년 전통이라는 어느 서점 주인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사실 찾는 책이 있었습니다.

"혹시 '아리랑사'에서 나온 <얄개전>을 구할 수 있을까요?"

주인은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남궁동자>는요?"라고 묻자, 40년 전통 헌책방의 주인은 "구해달란 사람은 많은데 당최 물건이 나와야 말이죠"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만약 위에 언급한 책들과 출판사를 안다면 대략 50대 이상일 겁니다. 1970년대를 풍미한 조흔파 작가와 최요안 작가의 '명랑소설'들이니까요. 물론 1990년대 이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지만 제가 찾는 건 1970년대에 아리랑 출판사에서 나온 그 책들입니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은 동묘 앞 풍물시장에 규모가 큰 헌책방이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동묘 앞 헌책방의 서고  동묘 앞 풍물거리에는 빈티지 옷가게와 골동풍 가게 외에 헌책방도 여럿 있다.
▲ 동묘 앞 헌책방의 서고  동묘 앞 풍물거리에는 빈티지 옷가게와 골동풍 가게 외에 헌책방도 여럿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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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에는 빈티지 의류 가게와 골동품 가게만 있는 줄 알았었는데 헌책방들도 있더라고요. 가게는 몇 안 되었지만 청계천보다는 커 보였고 그만큼 책도 많았죠.

'김찬삼'부터 '계몽사'까지... 그 시절 추억에 풍덩

한 서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 빼고는 책들로 빼곡했습니다. 혹시 여기라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았죠. 그런데 서가 구경을 하다 보니 그곳에 간 이유를 금세 까먹고 말았습니다. 추억의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특히 오래전 우리 집 책장을 장식하고 있던 <김찬삼 해외 여행기> 전집이 저를 옛 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외국에 나가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세계 여행을, 그것도 1950년대에 세계 일주를 한 여행기는 닫힌 세상을 엿볼 수 있었던 창이나 다름없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를 꺼내니 주인이 저를 뚫어지라 쳐다봤습니다. 그곳에 간 목적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아리랑사에서 나온 <얄개전>이나 <남궁동자>가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주인은 어디에선가 수첩을 꺼내왔습니다.

"대기 인원이 좀 되니까 기다려야 할 거요."

나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니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저를 대기 명단에 올리곤 1970년대 이전에 출판된 책들이 꽂힌 서가를 넌지시 알려주었습니다.
 
계몽사 동화책  70년대에는 외국 동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한 동화들이 많았다. 효과 충을 강조한.
▲ 계몽사 동화책  70년대에는 외국 동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한 동화들이 많았다. 효과 충을 강조한.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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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책 먼지 사이로 눈에 익은 출판사의 책들이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있었던 계몽사 동화책들이 저를 또 붙잡았습니다. 색바랜 표지와 푸석푸석한 종이들이 오랜 빈티지(?)를 자랑하는 듯했죠. 하지만 인쇄된 글자들은 그때 그대로였습니다. 불현듯 어떤 책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계림문고>는 없나요?"

1970년대,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살 수 있었던 동화책입니다. 짧건 길건 모든 작품이 책 한 권으로 편집된 시리즈였죠. 동화 전집이 많았던 시절에 낱권으로 살 수 있어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책은 낱권으로는 안 들어오고 가끔 수십 권씩 들어와요. 얼마 전에도 40권쯤 세트로 들어왔는데 금세 나가더라고요. 귀하기도 하고 찾는 사람도 많아서 비싸요."

생각해보니 어릴 적 제 책장에도 <계림문고>가 수십 권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없습니다. 이사도 하고 결혼도 하고 하면서 예전에 모아둔 책들이 사라진 것이죠. 아까운, 아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 책방 저 책방에서 책을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심 봤다!"를 외칠 뻔했습니다. 대학 시절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뜨거운, 책과의 만남
 
이토록 뜨거운 만남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일부 기독교 계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 이토록 뜨거운 만남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섰던 일부 기독교 계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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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와 최완택 목사가 쓴 <이토록 뜨거운 만남>이라는 책이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는 기독교계 일부도 앞장섰었습니다. '민중신학', 그러니까 권력과 부를 가진 자를 위한 신이 아닌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한 신을 외치며 약한 자들 편에 섰던 것이죠. 저자들도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위한 목회를 했고, 그런 관점에서 기독교와 성경에 관해 쓴 산문집입니다. 당시로써는 진보적(혹은 위험한) 기독교 사상을 담았던 거죠.

제게는 거짓된 세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아갈 때 제 생각의 한 면을 잡아주었던 책이었습니다. 금서까지는 아니었지만 검문 당할 때 갖고 있으면 곤란한 책이었죠. 제가 군대 가자마자 어머니가 버린 책 중 한 권이기도 했고요.

책을 꺼내 들고 주인을 쳐다보니 기다렸다는 듯이 값을 불렀습니다. 두꺼운 양장본 책보다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 앱으로 검색하니 오래전에 절판됐다는 기록만 확인됐어요. 지갑을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왜 헌책방을 찾아 나섰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흔적'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전 제가 읽었던 책은 어쩌면 그 시절 저의 흔적일 수도 있으니까요. 제게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한다는 거였고,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행동하냐는 걸 정하는 거였습니다.

젊었을 때 읽었던 책들을 찾아보면서 그때 제가 한 생각과 말들과 행동을 따라가 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하는 생각과 말들과 행동을 떠올려 봅니다. 지금 제가 옳다고 믿는 세상의 가치는 어쩌면 제가 젊었을 때 만들고 싶었던 세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습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거죠.

하지만 그동안 저는 어떤 결정을 했고 어떤 행동을 해 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혹은 그들은 어떻게 해 왔을까 곱씹어보기도 합니다.

만약 그 시절의 생각과 말을 행동으로 옮기며 살지 못했다면, 앞으로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좋은 세상 만들자고 소리 높이는 모든 사람에게 하고픈 말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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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전을 위해 하프타임을 보내는 50대 남자. 월간문학 등단 수필가이자 동화 공부 중인 작가.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글을 연재 중인 칼럼니스트.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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