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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학원 아르바이트 당시 옆 수학교실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똘똘이라 불리던 친구의 목소리였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에는 지방자치 단원이 있다. 그는 "의회와 정부가 서로 짜고 나쁜 짓을 할 땐 그럼 누가 감시하냐"며 시민단체 설명까지 끌어 냈을 정도로 명민했다. 그런 똘똘이가 옆방에서 악다구니하고 있었다.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나왔지만 격해진 감정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작은몸'이 어찌나 커다란 분노를 뿜던지, 일단 안아서 등을 토닥였다. 참았던 눈물과 함께 쏟아낸 전말은 이랬다.

그는 제아무리 똑똑해도 공부보다 노는 게 좋은 보통의 초등학생이었다. 떠들면서 풀다 보니 늘 시간을 넘겼다. 그날 선생은 석 장 다 풀면 놀게 해준다는 약속을 했다. 그제야 똘똘이는 실력을 보였다.

약속한 양을 단숨에 풀자 선생이 당황했다. 원장 눈치에 나가서 놀라 할 수도 없고, 교실에 두자니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가 돼서다. 선생은 큰 생각 없이 석 장을 더 풀라고 했다. 교실 질서가 더 중하다는 판단에서다. 

약속이 깨졌다. 똘똘이 입장에서는 일방적이었다. 부당하다 생각한 그는 선생에게 즉각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이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놀기 위해' 풀이 시간을 단축한 똘똘이에게 이는 기만이었다.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선생도 놀게 해주고 싶었으나 선례를 남기면 너도 나도 그러겠다 할 터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이 실수였고 이를 철회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철썩같이 믿은 똘똘이가 여기에 능력과 시간을 이미 쏟아 부었던 것. 억울했다. 억울해서 대들었다. 지키려던 교실 질서는 카오스로 변했다.   

약속과 달걀은 깨지기 쉽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세상 이치 이상도 하다. 깨져봤자 장바구니 하나 더러워지는 달걀은 조심조심 다루면서도, 생사가 놓인 약속은 참 잘도 깨지니 말이다. 

혈맹혈맹 하더니 방위비 분담금을 전년 대비 5배 이상을 한국에 요구한 트럼프 대통령의 계산기는 시리아 북부를 향해서도 두드려졌다. 독립국 건설 약속에 미국 특수부대와 IS 격퇴에 나섰던 쿠르드족은 트럼프의 배신으로 삶의 터전이 위태로워졌다. 트럼프가 "그들이 잘 해내길 바란다. 우리는 7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며 동맹 파기 트윗을 날리는 동안 최소 16만 명이 쿠르드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터키의 공격을 피해 짐을 꾸려야 했다. 

권력의 농간으로 삶의 터전이 위태로워 진 게 어디 쿠르드족뿐인가. 교전권을 포기한다는 평화헌법을 제정하고도 자위대 전력을 꾸준히 보강하던 일본은 현재 미국을 등에 업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SOMIA) 연장을 압박하고 있다. 사고 직후 잘 해결하겠다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도 '모두의 바다'에 방출할 모양새다. 환경 영향이 적다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보고서가 관련 소위원회에 제출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전쟁 범죄도, 핵발전소 사고도 일본은 책임질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그로 인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한국과 후쿠시마에서 억울한 억장을 부여잡고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747공약과 함께 녹색 성장을 외치던 MB가 4대강에 '녹조라테'를 만들어 담근 돈이 자그마치 22조란다. 전국민의 일상을 구제하고도 남는 액수다. 수질오염으로 가장 힘없는 물고기부터 떼죽음을 당했다. 2007년 대선 당시 KBS 선거연설방송에서 "우리 집 내외 집 한칸이면 족하니 나머지 전 재산은 다 내어놓겠다"던 그는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재판 중이다. 지난 3월 병보석 석방 당시 '가택연금' 조건이 달렸지만 최근 참모진을 만나는 모습까지 포착됐다. 

기분 탓인가. 깨진 약속에 생채기 난 '몸들'이 나라 안팎으로 차고 넘치지만 정작 신뢰를 저버린 얼굴들은 반질반질해지는 것 같으니. 울면서 억울을 익힌 '작은몸'은 다음 날 학원을 나오지 않았지만 그곳이 자퇴 불가능한 사회라면? 언론사인 줄 알고 입사했는데 '어뷰징(검색어 기사)'만 시킨다고 "내가 이러려고 언론고시 공부 했나 자괴감만 든다"고 항명할 수 있을까. 

약속은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행위'다. 법적 효력이 있는 타인과의 약속은 계약이라 하고 자기와 한 약속은 계획이라 한다. 간밤의 다짐만 무너져도 양심이 자존감을 긁는데, 권력을 쥔 양심은 '토끼의 간' 마냥 유체이탈을 한다. 달걀이 약속보다 덜 깨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달걀은 깨지면 제 바구니가 더러워지지만 약속은 깨지면 대게 약한 사람 쪽이 다친다. 

빼곡히 적힌 일정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준다는 사랑에, 뼈를 묻겠다는 입사 지원서에, 서민을 위해 뛰겠다는 정치인의 공약에,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나라 간 조약에 누군가는 시간을, 누군가는 마음을, 누군가는 능력을, 누군가는 열정을, 누군가는 생사를 건다. '약속은 어겨야 제맛'인 줄 아는 비양심들에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으면 교실 질서는 '작은몸'의 분노로 무너진다.  

학생이 정당하게 쟁취한 '놀권리'를 동의없이 파기해도 선생은 늘 그랬듯 별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외면하기에 똘똘이는 사리가 밝았다. 천진하던 초등학생도 억울하니 까무러쳤고, 약속의 무게를 깨달은 선생은 식겁했단다. 곧 총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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