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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울의 한 세공노동자가 사업장의 청산가리를 음독해 생을 달리했다. 관리되지 않는 화공약품이 얼마나 위험하고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경력 20년의 주얼리(귀금속) 세공 노동자다. 주얼리 제조업에는 영세사업장이 대다수다. 그러나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사업장이 작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 없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사업주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 없다. 서울 도심 역사를 지키겠다고 도심 제조업 특구를 만든 서울시라면 도심 제조업 노동자들의 고통도 이제는 함께 나눠야 한다.

서울의 도심형 제조업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서울시 노동안전보건조례 제정을 통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지역 차원의 안전망이 만들어지기 바란다.

'그림자 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자' …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

대한민국 귀금속 생산의 60%~70%가 서울시에서 이뤄지고 있다. 약 1500개 업체에 6천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1만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귀금속 이면에 열악한 노동자들의 현실이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주얼리 업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도 전무했다. 다행히 최근 서울시 산하의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주얼리 업종 최초로 노동과 안전, 건강에 대한 실태조사를 했다.

영세사업장이 대다수인 주얼리 업종에서는 근로계약서 작성·교부율도, 근로기준법 준수율도, 4대 보험 가입률도 낮다. 5인 미만 사업장이 많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노동자들도 많다.

응답자 중 노동자에게 "현재 일하는 사업장의 4대 보험 가입 비율"을 물었을 때 '모두 가입하지 않음'은 62%, '일부가입'이 10%, '모두 가입' 했다고 한 비율은 28%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파도 산재신청을 하지 못하거나, 산재신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303명 중 지난 12개월간 다친 경험이 있는 사람은 27명이었고, 이 중 14명이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14명 중 산재요양을 신청한 사람은 없었고 모두 자비로 치료비를 부담했다.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는 일단 4대 보험을 안 들었으니 산재처리는 무조건 안 되고 병원 갔다 와라 그게 다죠. 병원 갔다 와서 옛날 같은 경우는 일 못하게 되었으면 좀 쉬어라, 그게 바로 해고되는 거고. (치료비도 안 주고요?) 그렇죠."
- 주얼리 노동자 심층면접조사에서 노동자A

"광실에 막내로 들어온 친구가 있었는데,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어요. 일단 병원을 갔어요. 비용은 회사에서 냈어요. 산재보험 적용하면 보험료가 오르니까 치료비를 개인에게 주었어요. 보험 적용 안 하고요."
-주얼리 노동자 심층면접조사에서 노동자B
 
 
주얼리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은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가

주얼리 노동자들은 과산화수소, 시안화나트륨, 수산화나트륨, 에탄올아민 등 다양한 유해화학물질을 다룬다. 분진, 소음, 고온에 따른 만성적 호흡기 질환, 난청, 반복적인 작업으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에도 노출되어 있다. 세밀한 작업과 밝은 조명으로 인한 안과 질환의 가능성도 높다.

주얼리 제조업에서 사용되는 물질은 작업환경측정 대상 물질이다. 이에 따라 산업안전보건법상 정기적으로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고, 특수건강검진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작업환경측정을 시행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5.6%에 불과하고 그나마 측정결과를 알고 있는 응답자는 3.6%에 불과했다. 특수건강검진 실행률도 비슷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쓰고 있는 유해물질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이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건강에 미치는 영향, 안전하게 취급하는 방법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사업주는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정이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안전한 설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스트리핑(청산가리 작업)' 공정을 예로 들면, 제법 규모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아래와 같은(사진1) 최소한의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10인 미만 공장에서는 이마저 갖추지 않아 노동자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규모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최소한의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10인 미만 공장에서는 이마저 갖추지 않아 노동자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규모가 있는 사업장에서는 최소한의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10인 미만 공장에서는 이마저 갖추지 않아 노동자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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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리 노동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작업환경, 서울시가 노력해야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있어도 영세사업장 특성상 사업주가 '제도를 잘 알지 못하거나', '비용/정책 지원의 문턱이 너무 높아' 어렵다는 토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번 실태조사를 계기로 사업주와 노동조합, 정부기관과 지자체가 함께 안전하고 깨끗한 주얼리 제조 현장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시 노동안전보건 조례가 제정되면 도심형 제조업은 서울시로부터 직접 산업재해 예방 및 노동안전보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을 준수하며, 산업재해 예방 및 노동안전보건 증진·향상을 위해 노력해나가고, 노동자는 적극적으로 교육과 현장 개선에 참여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조례안에는 유해환경 작업 전 노동자 사전교육, 노동자 대표 및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위촉 지원, 출입허용, 활동시간 보장 등 협력,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구성 운영 및 심의의결 사항 이행 및 활동시간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현장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노동자대표 또는 노동조합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가장 정확하게 현장 조사가 이뤄질 수 있고, 실효성 있는 개선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이해도와 체감도도 훨씬 높일 수 있다. 정책의 효과가 정확하고 빠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도심형 제조업인 귀금속 업종이 서울시 노동안전보건조례 제정을 통해 안전하고 건강한 일자리로 재탄생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덧붙이는 글 | 김정봉 기자는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 주얼리분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동안전보건조례, #주얼리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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