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률 제로, 공교육의 책무입니다
1980년 10월 28일, 부임 나흘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바닷가 마을 ○○초등학교 4학년 학생 48명 앞에 섰습니다. 간단한 소개와 부임인사를 하고 그날 일정대로 10월말 학력평가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학생 실태조차 미리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칠 테니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주기 바랍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10월 말 시험을 치르는 날입니다. 국어 시험지를 잘 읽고 답을 적어서 내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시험을 나눠준 지 10분도 되지 않아 다 했다는 아이들이 열 명을 넘었습니다.
"우와, 공부를 참 잘하는 친구들이 많은 가보구나. 자기 이름을 꼭 썼는지, 빠뜨린 답은 없는지 꼭 확인하세요. 다했다는 친구들 시험지를 좀 볼까요?"
그 순간 저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15명의 아이들이 보여준 시험지에는 아는 글자 한두 글자를 칸마다 적어놓았습니다. 번호를 쓴 것도 제대로 맞춘 것이 없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너무나 태연한 아이들 모습이었습니다. 48명 중에 15명이 글자를 모르다니! 그것도 고학년을 바라보는 10월 말에! 겁에 질린 24살 초보교사는 아이들의 시험지를 들고 교장실로 달려가 울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아이들이었지만, 무거운 책임감에 앞뒤 가리지 못하고 사표를 내겠다고 울어버렸으니 교장 선생님은 또 얼마나 놀라셨을지! 아직도 그날이 생생합니다. 제가 오기까지 담임 선생님 없이 석 달을 기다린 아이들인데 후임이 올 때까지 한 달만이라도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교장 선생님의 간곡한 부탁 말씀에 한 달을 약속하고 시작한 교직생활이었습니다. 그 한 달이 이어져서 정년퇴직까지 했으니 교직은 제 인생 그 자체입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바닷가 마을 ○○초등학교 4학년 학생 48명이 가득한 교실, 석 달째 담임선생님이 안 계셔서 옆 반 선생님이 두 반 96명을 가르치고 있던 상황. 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한 선생님이 가르쳤으니 안전사고라도 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학력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착하고 순수했던 그 맑은 아이들의 표정, 아직도 입안에 맴도는 이름들. 그것은 첫사랑만큼이나 오래 가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사 부족으로 학교가 힘들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반 아이들은 4년 째 담임 선생님과 제대로 공부를 못한 셈입니다. 그러니 48명 중에 15명이나 된 아이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 슬픈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대를 나온 선생님들이 보수 조건이 훨씬 좋은 기업으로 빠져 나가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부족하여 땜질처방으로 겨우겨우 채우던 시절. 학급 당 학생 수도 많은데 가르칠 선생님마저 태부족이었으니 학교현장은 기초학력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시달리던 시절.
저는 가난 때문에 주경야독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더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공무원 생활 틈틈이 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과 공부를 병행하여 졸업했습니다.
보름에 가까운 출석수업도 과제물도 성실히 이행했고 졸업시험까지 무사히 마쳐 준교사 자격증을 받던 기쁨. 대학생활의 낭만은 없었지만 순위고사를 치르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다음 날 부임하러 찾아가며 너무 멀어서 울었던 기억까지 생생합니다. 하루 두 번 다니는 시골 버스는 돌길에 튀어오르며 구불구불 비포장 길을 달리며 바다를 보여주었지만 낭만조차 느낄 수 없었던 내 생애 첫 학교는 설렘보다는 걱정과 연민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을 약속한 나는 정규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을 하교시키고 나면 해가 질 때까지 15명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따라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르쳐 준 낱말이나 문장으로 받아쓰기를 하며 읽기 부진으로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아이들과 퇴근 시간을 잊은 채 매달렸습니다. 다행히 난독증을 지닌 학생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 동안 국어 책을 읽어내는 아이들이 늘어갔습니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에 놀라고 감동한 아이들과 나는 마음으로부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4학년이 끝날 무렵 거의 모든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독서교육을 병행하니 아이들의 읽기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습니다. 독서교육이 없는 단순한 읽기 지도는 문해력과 독해력으로 이어지지 못해서 학습 부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날마다 책을 읽도록, 숙제로라도 읽게 했습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은 몇 달째 장기결석 중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 채 가정 형편 때문에 할아버지와 함께 일만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가정방문 끝에 학교로 나오게 했던 아이는 키도 크고 손도 큰 그 아이는 농사일도 잘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니며 좋아하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이제 쉰 살이 넘었을 그 제자들은 아직도 저를 찾으며 책을 읽던 그날들을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무릎에 앉아서 동화책 이야기를 듣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만약 그때 15명의 문맹 학생들을 포기하고 교문을 나섰다면 나는 평생 죄스러움을 안고 살았을 것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순간이었지만 가장 보람을 느꼈던 초임지의 추억은 남은 인생의 길을 다시 힘내어 걸을 수 있게 해줍니다. 인간은 행복한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니까요.
공교육의 불편한 진실, 외면하지 말아요
첨단 시대를 향해가는 지금도 배움의 장소인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는 읽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게 불편한 진실입니다. 겨우 글은 읽지만 그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 초등학교 고학년이지만 읽기조차 안 되는 아이들은 공부하며 입는 상처로 날마다 고통을 받습니다. 문맹자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학교라는 베일에 싸여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 받을 권리를 찾지 못한 채 악몽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바로 학교 속의 문맹자들입니다.
아무런 장애가 없는 아이가 고학년이 되도록 한글 해독이 안 되는 납득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저자는 아이의 교육받을 권리를 이 지경으로까지 외면한 한국 공교육의 현주소를 탄식하며 읽기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실행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학교 속의 문맹자>는 학교 속 문맹자들의 실태와 그러한 현상의 밑바탕에 깔린 문제, 그 문제에 책임을 느껴야 할 이들은 누구이며, 문제 해결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다룬 연구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자신의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읽기 부진아를 대하는 교사들 중에서 '읽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독서 지도 방법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또 그러한 실천을 가로막고 있는 학교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교실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앉아 말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읽기 부진아의 감추어진 고통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저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첫째, 아이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라.
둘째, 학교 속의 문맹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적인 식견을 지닌 교사를 양성하라.
셋째, 조기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라.
기초학력 부진이나 학교 속의 문맹자를 구하는 일은 그 어떤 교육 문제보다 최우선적으로 접근해야 될 문제입니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들을 물고 들어가는 악순환의 고리이기 때문입니다. 공교육마저 양극화 되어서 잘하는 학생은 더 대접받고, 하위 그룹에서 허덕이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며 학습 부진의 늪에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학생들을 구하는 길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조기 개입, 독서교육, 전문성을 지닌 교사
첫째,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나기 전에, 할 수만 있다면 입학 전 6개월 전에 조기 진단과 조기 개입이 중요합니다.
둘째, 부진 학생은 일대일 지도를 하되 반드시 독서교육을 병행해야 합니다.
셋째, 양질의 교사 교육, 특히 교대 교육과정에 난독증을 비롯한 읽기 따라잡기 프로그램 도입으로 모든 교사를 전문가 수준으로 양성해야 합니다.
영국의 독서교육, 핀란드의 무상교육, 미국의 '리딩 퍼스트(Reading First)', 뉴질랜드의 '리딩 리커버리(Reading Recovery)'의 공통점은 조기 개입과 독서교육, 교사 교육 덕분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도적인 뒷받침과 전문성을 지닌 교사를 최대한 우대하는 핀란드의 문맹률 제로화는 단연 돋보입니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은 교사 교육의 필독서로 적극 추천하는 바입니다. 학교를 떠나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인 자리에서 읽은 이 책의 화두는 결코 가볍지 않아서 우리 모든 교육자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과 한숨을 함께 주어 가슴에 손을 얹게 할 것입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들에게 무엇을 더 했어야 했는지 아프고 뜨거운 질문을 하며 힘들게 책을 덮습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지만, 교육은 미완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며 아직도 나는 교사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50명이 넘는 학생들을 데리고 날마다 낭독을 시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받아쓰기를 시키며, 독서를 강조하신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나의 은사님!
철저한 기초기본교육 덕분에 내 친구들은 모두 책을 읽고 졸업을 할 수 있었음을! 특히 1학년 황금만 선생님, 6학년 김신석 선생님의 뜨거운 제자 사랑을 교직 생활 내내 저의 모델로 삼아 단 한 명의 문맹자도 남기지 않았으니 최고는 못 되어도 죄인만은 면했으니 하늘에 감사하고 은사님께 고맙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희망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교닷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