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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
 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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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 천문학적 규모가 되면, 어떻게 쓸까보다 어떻게 지킬까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만한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을 수도 있으므로, 대중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창고를 든든히 하고 경비 인력을 늘리면, 괴도 루팡 같은 전문 도둑은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와 견제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데는 역부족이다. 역사 속의 민란들로부터 잘 증명되듯, 대중이 분노하거나 단결하면 창고와 경비 인력만으로는 재산을 지키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재벌급 부자들은 고대 이래로 군사력에 의존해 왔다. 상당수 부자들은 군사력을 직접 구축했다. 이런 부자들은 왕실 혹은 대귀족으로 불렸다. 왕실이 가진 군사력은 군대, 대귀족이 가진 군사력은 사병으로 호칭됐다. 왕실과 귀족 상당수는 이런 병력으로 재산을 지켰다.

군사력을 갖지 못한 부자들은 군사력을 가진 쪽과 제휴하는 방법으로 재산을 지켰다. 군사력을 가진 쪽의 신하가 되고 일정한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재산을 지켰다. 이런 관계를 현대 한국인들은 정경유착이라 부르고 있다.

한편, 둘 중 어느 쪽에도 끼지 않는 부자들이 어느 시대나 항상 존재했다. 사채업·성매매·마약업·복권업·인신매매처럼 국가권력이 공인해주기 힘든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의 재산 축적을 합법화해줄 경우, 국가는 정통성 위기에 직면해 혁명이나 폭동을 자초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류의 부자들은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한 채 지하경제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들 '지하의 부자'들도 경비 병력을 보유하거나 정경유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업의 성격상, 그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노골적으로 그렇게 했다가는 대중과 국가권력 양쪽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하 부자'들이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비법은 '돈이 없는 척', '부자가 아닌 척' 하는 것이다. 재산 규모로만 보면 왕실이나 귀족 못지 않지만, 지나치게 위세를 부리다가는 대중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가급적 '아닌 척', '없는 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지구 전역에 널리 퍼진 관념이 지하 부자들의 재산 보호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대기업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지지하는 '정경 분리'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19세까지만 해도 민란이 발생하면 지방정부는 물론이고 그 지역 지주나 지하 부자들까지 공격을 받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대기업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한층 더 강조되고, 이는 대기업이 국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뿐만 아니라 민란이나 혁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20세기 이후의 민란이나 혁명은 부자들에게는 직접적 타격을 주지 않는다. 과거와 달리 20세기부터는 시위 군중이 부잣집이나 고리대금업자한테 달려가는 일이 현저히 적어졌다. 정경분리 관념이 확산되면서, 국가 부조리의 원인을 경제보다는 정치에서 찾으려는 관념이 전파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민란으로 인한 지하 부자들의 피해도 이전보다 많지 않게 됐다. 민란이나 혁명에 참여한 군중의 의식이 국가권력 쪽으로 좀 더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가 전화하면 정주영이 벌떡 일어났다?
 
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의 일대기를 그린 1991년 2월 27일자 <매일경제> 기사.
 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의 일대기를 그린 1991년 2월 27일자 <매일경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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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변화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행운을 누린 인물들이 있다. 그중 하나로 사채왕 단사천(1914~2001)을 들 수 있다. 나중에는 한국제지·해성산업·계양상사 같은 기업도 경영하고 학교 경영 및 장학 활동에도 관여했지만, 그가 그만한 재력을 구축한 원동력 중 하나는 다름아닌 사채업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 때인 1950년대에 서울 명동에서 사채왕으로 군림했다. 1982년 7월 3일자 <매일경제>에 실린 '재계 명사 동중정 <15>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이란 기사에서 "단 회장은 한때 돈을 가장 많이 벌었고 특히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그는 현금왕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그 자신은 이 점을 부인했다.

단사천은 일제강점 4년 뒤이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연도인 1914년 8월 16일, 지금의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출생했다. 개성특별시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 1시간 거리인 서흥군에서 태어난 그는 해주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중퇴하고 18세 때 경성(서울)으로 이주해 어머니 쪽 친척집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23세 때 일만상회라는 재봉틀 조립회사를 차린 그는 1945년 해방 뒤 해성직물상회를 설립했다. 재봉틀과 연관되는 업종에 진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직후, 그는 연관성이 별로 없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했다. 그게 바로 사채업이다.

금융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사채업자가 은행 역할을 했던 그 시절에 그는 사채업 메카인 서울 명동에서 발군의 위상을 확보했다. 현금 동원 면에서 국내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 어느 시점인지는 불확실하나, 하루에 수천 억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병철이나 정주영보다 그의 재력이 더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언론보도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단사천에게서 전화가 오면 정주영이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는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단사천이 20세기 사람이 아니라 19세기 사람이었다면, 합법적으로 번 재산은 몰라도 사채업으로 번 재산은 일상적인 위기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19세기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민란이 빈발했다.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약 100개의 민란이 19세기를 장식했다. 그랬기 때문에 단사천 같은 지하 부자들은 19세기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는 시위대가 부자나 고리대금업자를 습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1960년판 민란인 4·19 혁명 때는 달랐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관념의 영향으로 인해, 대중의 분노는 이승만 정권과 소수 재벌에 집중됐다. 그나마 재벌에 대한 압박도 철저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단사천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60년 9월 1일자 <경향신문> 1면 톱기사인 '196억환을 통고처분'에도 나타나듯이, 단사천은 삼성그룹 이병철 및 삼호그룹 정재호 등과 함께 24명의 주요 조세포탈자 명단에 올랐다. 이로 인해 추징금 및 범칙금 통고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성산업 대표라는 자격에 따른 것이었다. 사채업자로서 지하경제에서 번 수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경분리 논리에 따라 그는 대중의 분노에 덜 직면하고 재산도 지킬 수 있었다. 지하 부자들에게 좀더 유리한 세상이 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민란의 화살을 살짝 피한 단사천은 전화위복을 맞는다. 4·19 이듬해에 5·16 쿠데타가 발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기업인들과 제휴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단사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햇볕'을 쬐게 된다.

1961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 기사 '실업인의 대동단결 촉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단사천은 송요찬 내각수반 등과 80여 명의 기업인이 참여한 경제간담회에 참여해 훗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발전하게 될 새로운 경제단체의 설립을 논의하는 자리에도 참석했다. 지하에서 올라온 부자가 지상의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것이다.
  
생전의 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의 모습을 조명한 1982년 7월 3일자 <재계명사 동중정> 연재기사.
 생전의 단사천 전 한국제지 회장의 모습을 조명한 1982년 7월 3일자 <재계명사 동중정> 연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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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1/4 이상인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그 뒤 그는 안정적인 탄탄대로를 달렸다. 1974년 6월 17일자 <매일경제> 기사 '국세청 집계, 재벌 2세 점차 부각'에 따르면, 1974년에는 그는 호남정유 서정귀 및 원풍그룹 이상순 등과 함께 10대 고액 납세자에 올랐다. 수입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던 명동 사채왕이 합법적인 사업가로서 고액 납세자 명단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

그가 4·19라는 위기를 피해 사채왕에서 고액 납세자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자신의 노력에도 기인했겠지만, 그보다는 지하경제에 유리해진 사회환경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투쟁의 대상이 부호층보다는 행정부로 좀 더 집중된 것이 단사천 같은 사채왕한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환경변화 덕분에 4·19의 파고를 피하고 5·16 이후 양지에서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채왕 단사천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우리 사회가 그런 사채업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채업이 포함된 지하경제의 규모가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한 사회적 부조리도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정확히 집계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이나 5분의 1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하경제 규모를 대한민국 전체가 아니라 시도별로 추정한 권선주 창원대 교수의 논문 '한국 지하경제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 조세부담을 중심으로'는 "2000년부터 2013년 기간에 전국 지하경제 비율은 기준연도(2000년)의 20%에서, 각 지역별로 다르게 지하경제 비율도 점차 하락"했다며 "2013년에 광역시는 지역총생산의 평균 19.58%, 도 지역은 19.45% 지하경제 비중을 유지"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면서 "지하경제 비중이 가장 낮은 지역은 충남으로 19.09%, 다음으로 낮은 지역은 경기로 19.25%"이며 "지하경제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은 부산·대구·강원으로 19.64%"라고 말한다.

지하경제는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에도 지장을 준다. 전통적 일자리가 감소할 수밖에 없는 4차 산업시대에 대한민국은 복지를 확대하고 기본소득제도 등을 고민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국세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하경제를 최대한 축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하경제가 커지게 되면, 그들과 거래하는 합법적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대기업 경영자가 불법 사채에 손을 대면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회계장부를 분식하게 되고, 주주나 채권자에게도 불측의 손실을 입히게 된다.

한국 기업의 건전성을 높이고 국가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서라도 지하경제 축소는 꼭 필요하다. 정경분리 관념 뒤에 숨어 있는 지하 부자들이 단사천처럼 양지로 올라오도록 만들려면, 온 국민과 국가의 전폭적 관심 및 개입이 필요하다. 그들을 지하에서 끌어올리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태그:#사채업, #단사천, #지하경제, #사채왕, #정경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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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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