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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입구에 있는 정려각과 비각. 정려각에는 충신 일암선생과 열녀 온양 정씨의 정려가 모셔져 있고 비각에는 전주 이씨 집안의 충노를 기리는 비가 있다.
▲ 두칸짜리가 정려각, 옆에 한칸 짜리는 비각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입구에 있는 정려각과 비각. 정려각에는 충신 일암선생과 열녀 온양 정씨의 정려가 모셔져 있고 비각에는 전주 이씨 집안의 충노를 기리는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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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옥실 마을 입구에는 두 채의 비각이 있다. 시골 마을에는 이런 문화재로 짐작이 되는 오래된 비각들이 많다. 그러나 그 비각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안내문조차 없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자료를 찾는 수고를 해야 알 수가 있다. 그 비각의 주인공의 행적이 남달랐기에 비석까지 만들어 기리고 있다고 하지만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항상 지나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그 비각의 주인공이 궁금해서 그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은 주인을 대신해서 죽은 노비를 위해 비석을 마련해주는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
▲ 설천 선생 충노비 앞에는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제단이 마련되어있다.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은 주인을 대신해서 죽은 노비를 위해 비석을 마련해주는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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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명칭은 한 채는 정려각(旌閭閣)이고 다른 한 채는 비각(碑閣)이라 한다. 이 두 채에는 조선 시대 한 집 안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겪어냈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있었다.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국가에서 내린 포상으로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거나 포상 내용을 현판에 써서 작은 집을 만들어서 걸어두는 것을 말한다. 그 정려각 안에는 충신 이기지(李器之, 카스텔라 만들기를 처음 시도했던 조선의 선비)와 그 며느리 온양 정씨의 정려 현판이 모셔져 있다.

일암 이기지 선생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쓴 기사 '조선의 선비 카스텔라 맛에 반하다 http://omn.kr/1ming'에 자세하게 소개했다. 일암 선생이 살았던 조선은 숙종과 경종, 영조로 이어지던 시대였다. 역사를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세 임금의 시대만큼은 TV 사극과 영화 등으로 빈번하게 드라마화 되었기에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장희빈과 사도세자,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등이 그 시대의 인물들이다. 그들이 롤러코스터 같았던 희비극의 역사 뒤에는 당파 싸움이 있었다. 조선의 역사는 상대가 전멸해야 끝이 나는 제로섬 게임 같은 당파 싸움의 역사였다. 영화 <사도>(2014년 감독 이 준익)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희빈과 사도세자는 왕가의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지방의 선비들이나 한 가문이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던 스토리는 마을의 비석이나 정려 속에 갇혀 있다.

북경에서 선진 문물을 접하고 꿈에 부풀어서 돌아왔던 일암은 신임사화(辛壬士禍)에 휘말리게 된다. 노론에 속했던 일암의 부친 이이명은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 이명은 사약을 받게 되고 일암도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면서 당시 부여의 명문 가였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백강 이 경여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당시 임금이었던 경종이 소론의 상소를 받아들여 연잉군, 후에 영조임금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을 견제한 결과가 신임사화였다.

이쯤이면 드라마 공화국이라고 일컫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손에 땀을 쥐는 드라마 한 편 정도는 그려질 것이다. 순식간에 역적의 집 안으로 몰려 대가 끊기게 된 위기 속에서 이씨 집안 여인네들 이이명의 처와 며느리는 한 가지 묘안을 짜낸다. 감옥에서 요절한 일암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 이봉상과 집안 노비의 아들을 바꿔치자는 계획을 세운다.
 
이름도 없이 주인을 대신해서 죽었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의 충직한 노비의 비석.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비각 앞에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다.
▲ 설천 이 봉상을 대신해서 죽었던 노비를 기리는 충노비  이름도 없이 주인을 대신해서 죽었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 가문의 충직한 노비의 비석. 매년 제사를 지내주는지 비각 앞에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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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상과 동갑내기로 친형제처럼 자랐던 노비의 아들은 주인의 청을 뿌리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씨 집안에서 대대로 노비의 DNA를 타고 났던 그는 주인의 말을 거역하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이씨 집안 여인들이 시키는 대로 이봉상의 옷을 입고 백마강으로 뛰어가 투신하게 된다.

역적의 아들이 된 이봉상을 잡으러 왔던 포졸들이 시신을 건져내어 보니 인상착의가 이봉상과 다름이 없어 '역적의 아들 자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지어 버렸다. 이 씨 집안 여인네들은 노비의 아들을 이봉상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른다.

부여에서 노비의 아들이 죽음으로 시간을 끄는 동안 이봉상은 전라도 무주로 무사히 피신을 해서 죽은 듯 숨어 살았다.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 임금의 시대는 짧았다. 영조 임금의 시대가 되자 부여의 백강 가문에도 역전의 기회가 온다. 신임사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이 시작되자, 이이명의 부인 김씨(서포 김 만중의 딸)는 무주에서 숨어 살던 이봉상을 데려와 영조 임금을 찾아가 그 간의 자초지종을 아뢴다.

하지만 1722년 신임사화의 희생양이었던 부여의 백강 가문의 이이명과 이기지, 이봉상으로 이어지는 3대의 수난은 다시 노론, 소론 간의 당파 싸움 속에 쉽게 복권되지 못한다. 1740년에서야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매듭을 짓게 된다. 이이명에게는 충문의 시호가 내렸고 일암 이기지도 충신의 정려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의 스토리에서 보면 이봉상의 아내 온양 정씨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죽음을 바꿔치기를 했던 공(?)을 치하해 정려 현판이 하사된 것처럼 보인다.
 
조선 시대의 글인 한자로 되어 있어서 현대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주이씨 밀성군파 가문에서는 이런 훌륭한 가문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궁금증을 해소를  위해서라도 한글로 쓴 간판을 써서 세워줬으면 좋겠다.
▲ 열녀 온양 정씨의 열녀 행실을 기록해 놓은 현판 조선 시대의 글인 한자로 되어 있어서 현대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주이씨 밀성군파 가문에서는 이런 훌륭한 가문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궁금증을 해소를 위해서라도 한글로 쓴 간판을 써서 세워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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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향토사학자인 이진현님께 자문을 구해보니, 이봉상의 아내 온양 정씨가 받은 정려 현판은 남편 이봉상이 수명을 다해 죽자 보름 동안 곡기를 끓다가 따라서 죽었던 실화에 대한 정려였다. 이봉상을 바꿔치기해서 살려냈던 이는 이봉상의 첫 부인이었던 김씨였는데 일찍 세상을 하직해서 재가했던 부인이 온양 정씨였다.

노비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이봉상은 어린 나이에 겪은 시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부여에서 선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봉상의 현손 이용은이 이런 가문의 아픈 역사의 중심 인물이었던 노비를 가문의 차원에서나마 비석으로 새겨 조상들의 정려각 옆에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었다.
 
온양 정씨는 이 봉상의 첫부인 김씨가 일찍 세상을 하직한 후에 재가한 부인으로 이 봉상이 수명을 다하자 보름동안 곡기를 끊다가  남편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기에 열녀의 정려가 내려졌다.
▲ 이봉상의 재가를 해서 얻은 온양 정씨를 기리는 비석 온양 정씨는 이 봉상의 첫부인 김씨가 일찍 세상을 하직한 후에 재가한 부인으로 이 봉상이 수명을 다하자 보름동안 곡기를 끊다가 남편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기에 열녀의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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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문할 뻔 했던 한 가문을 대신해 죽음을 택한 이봉상의 노비는 '충노'라고 불리게 된다. 그 노비는 죽어서도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이봉상의 호를 써서 '설천선생충노기적비'로 남겨져 있다. 전국에 이런 역사적 스토리가 있는 충노비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태그:#조선의 선비 이봉상, #충노비, #정려각,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온양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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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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