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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전 아침, 김치냉장고가 수명을 다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작은 시누이가 선물해 주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딱!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빨간 불꽃 비슷한 것이 번쩍번쩍했다. 마침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 자세를 잡고 거실에서 열심히 책 읽고 필사하던 중이었다.

불이었다. 급한 마음에 후다닥 달려갔고, 벽에 옮겨 붙을까 싶어 그 무거운 냉장고를 단번에 끌어 돌려놓았다. 불꽃이 이는 지점을 보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 우왕좌왕하다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 냉장고 뒷면에 들이부었다. 세게 붓는다고 했지만 물은 불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2001년 구입해서 19년 사용하고 고장난 김치냉장고입니다.
▲ 고장난 김치냉장고 2001년 구입해서 19년 사용하고 고장난 김치냉장고입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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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마음에 엉뚱한 방향으로 부은 것이다. 눈앞에 전기코드 2개가 보였다. 하나는 김치냉장고가 분명했지만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코드를 다 뽑았다. '푸스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잦아드는 것 같더니 이내 꺼졌다. 

옆에서 바로 지켜보았기에 다행히도 빨리 수습을 할 수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어도 전선이 탄 독한 냄새가 계속 났지만, 이게 불꽃이 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을음이나 화재의 흔적은 없었다. 벽도, 냉장고 뒷면도 아무리 봐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니 냄새도 거의 사라졌고 김치냉장고는 있던 자리에 낡은 테이블처럼 놓여 있다.

수명을 다한 김치냉장고 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요즘 드물게 가사에 열중하면서 냉장고 파먹기를 실천하고 있던 차라 쓸모없이 쟁여놓은 오래된 것들은 없었다. 반통 정도 남은 매일 먹는 김치와 대용량의 음료수, 어머니가 보낸 매실과 고추 장아찌 정도였다. 다행히 큰 냉장고도 같은 이유로 공간이 여유 있었다. 김치냉장고에 있던 것을 냉장고로 물건을 옮겨 넣어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김치냉장고 없어도 되겠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당장은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이참에 김치냉장고 없이 살아보기 어때?"

딸까지 한 마디 거들었다. 당장은 괜찮다고도 생각했지만 힘들 것 같았다. 기껏 가져온 핑계라는 것이 아직 먼 이야기인 김장이었다.

"김장하면 김치는 어디다 두고..."

가전필수품이라던 김치냉장고 없는 일상
 
김치냉장고가 없어 냉장고에 김치통 3개가 들어가 여유가 없는 냉장고 내부입니다.
▲ 빈틈 없이 채워진 냉장고 김치냉장고가 없어 냉장고에 김치통 3개가 들어가 여유가 없는 냉장고 내부입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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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첫날, 더는 쓸 수 없는 김치냉장고 안과 밖을 깨끗이 청소했다. 3일 째부터 김치냉장고 위로 자잘한 물건들이 놓였다. 문을 안 열어도 되니 이리저리 치워야 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반통도 안 남은 김치가 있을 뿐이니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불편함이 안 느껴졌다. 평소에도 과일이나 채소는 조금씩 사 오는 편이고, 찬거리나 고기를 냉장고에 쌓아 두는 집도 아니었다. 

'어라! 이대로면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이상이 없잖아! 이건 계획에 없는 건데...'

가족들 말대로 냉장고 없이 사는 실험적인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5일이 지났어도 김치냉장고 없는 일상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6일째,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로 인해 김치 담그는 열혈 주부가 된 뒤로 김치를 할 때마다 조금씩 양을 늘려 제법 많은 양의 김치에 도전했었다. 그간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냉장고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도매시장까지 가서 김치거리를 잔뜩 사는 순간에도, 옆에 청과물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욕심껏 살 때에도 냉장고 사정은 생각하지 않았다. 

천 원에 두 단, 실감 안 되는 가격에 덮어놓고 많이 산 열무와 한동안 가족들이 잘 먹은 알타리를 그야말로 넉넉히 샀다. 많이 사도 가격은 소매 가격에도 미치지 않았다. 담그고 나니 김치냉장고에 들어가는 김치통으로 3통이 만들어졌다.

익을 때까지 밖에 둔 김치는 날이 더우니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익은 냄새를 솔솔 풍겼다. 김치냉장고에 들어갈 타이밍이었다. 애초에 김장까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장 담근 김치 넣을 곳을 걱정해야 했던 거였다.

과일은 야채칸을 모두 차지했고, 김치통 세 개가 나란히 그 위에 칸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음은 뿌듯한데 갑자기 답답해졌다. 뭘 더 살 것도 아니지만, 뭘 더 사도 넣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드디어 김치냉장고를 사야한다는 당위로 다가왔다.

​이쯤 되니 김치냉장고 없이 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김치를 넣고 보니 그날그날의 식재료, 찌개나 무침을 만들 채소와 양념 정도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어 있을 때는 크다고 생각했지만 채워지니 턱없이 좁고 작게 느껴졌다. 가족 모두가 집콕인 상황에서 삼식이 가족을 거느린 주부에게 부엌에서의 피로감을 덜어주려면, 일주일 정도의 부식은 냉장고에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8일이 지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크기 때문에 사오지 못한 수박을 아직도 못 먹고 있다. 수박 한 통을 금세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치냉장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슬슬 가족들 입에서도 냉장고에 넣을 데가 없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니 고장나기 전까지 김치냉장고를 19년 사용했다. 남들에 비해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10년 정도인 전자제품 평균 수명에 비해서는 잘 사용했던 것 같다. 김치냉장고 없이 산 8일. 그가 준 많은 편리함에 대해 잠깐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 드는 건 몰라도 나는 건 표가 난다더니 물건도 그랬다. 김치냉장고가 있을 땐 몰랐지만 막상 없으니 아쉬운 구석이 많았다. 그래도 살림을 꾸준히 하다보니 무조건 대형만을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김치냉장고를 산다면, 지금 사용하던 120L 용량이나 그보다 한 사이즈 큰 정도면 우리 가족에겐 충분할 것 같다. 

김치냉장고에서 버려지거나 썩어나가는 것 없이 알뜰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거면 될 것 같다. 김치냉장고 없이 산 8일, 제철 과일과 시원한 음료도 그립지만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썰어 놓은 시원한 수박이 제일 그립다.

태그:#김치냉장고, #안전점검, #휴대폰값, #김치냉장고사용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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