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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건' 32주년인 6월 4일이 다가오면서 중국 정부의 단속이 두드러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은 물론이고, 홍콩과 마카오에서도 추모 집회를 2년째 금지하고 있는 탓이다. (*천안문 사건: 1989년 노동자·학생·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자, 당시 중국 정부가 탱크와 군대로 이를 무력 진압해 사상자를 발생시킨 사건)
  
2016년 10월 1일, 중국 국경 당시 천안문 광장의 모습.
 2016년 10월 1일, 중국 국경 당시 천안문 광장의 모습.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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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경찰은 5월 25일 마카오민주발전연합회를 상대로 추모집회 금지를 통고했고, 홍콩 공안국은 29일 '애국민주운동 지원 홍콩시민연합회'의 추모집회를 금지했다. 홍콩의 경우에는, 지난해 6월 4일 시민 수천 명이 금지 통고를 무시하고 빅토리아 공원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홍콩의 민주화·시민 운동가인 조슈아 웡(Joshua Wong) 등이 이로 인해 실형 선고를 받았다.

중국 지도부는 추모집회에 반체제적 요소가 있다는 점과 코로나19 방역에 지장을 준다는 점 등을 내세워 막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중국 지도부가 얼마나 이 추모집회를 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세계 곳곳에서 감지되는 시민혁명의 열기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왼쪽)이 2019년 9월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에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역 중 한 명인 조슈아 웡(오른쪽)과 만나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왼쪽)이 2019년 9월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에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주역 중 한 명인 조슈아 웡(오른쪽)과 만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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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치는 '반(反)중국 진영과 중국의 대결' 또는 '친미 진영과 반미 진영의 대결'뿐만 아니라 '시민권력과 국가권력의 대결'이라는 구도에 의해서도 작동하고 있다. 2009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 퇴임 뒤로, 미국 보수세력이 주춤하는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후자가 한층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2011년에는 재스민혁명(아랍의 봄)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쓸면서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가 하야하고 리비아 최고지도자 카다피가 피살됐다. 그 뒤 시민혁명의 열기가 세계 곳곳에서 두드러졌다. 굵직한 사례만 열거하면, 2014년 홍콩 우산혁명, 2016년 한국 촛불혁명, 2018년 프랑스 노란조끼 혁명 등을 들 수 있다.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적 이해관계가 아닌, 자신들의 독자적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 민중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점은 미국과 대립하는 이란에서도 알 수 있다. 2019년 11월 15일의 휘발유 가격 인상은 이 나라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고, 국제앰네스티가 '11월 22일까지 최소 115명(이란 정부 발표로는 9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을 정도로 당시 민중 저항의 강도가 대단했다.

민중의 저항은 여타 지역들에서도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군부에 대한 저항이 강하고, 러시아에서는 푸틴을 반대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친미 진영은 이 나라들의 민중을 응원하고 있지만, 미국이나 브라질에서도 민중의 저항은 만만치 않다.

친중이냐 친미냐,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하는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상당부분 민중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이같은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그 속에서 동유럽에서는 이에 맞서는 극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나아가 서유럽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다.

민중이란 코드가 세계 정치에 한층 더 영향을 주는 와중에 중국과 홍콩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도전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서방세계가 그런 도전을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친중 대 반중의 문제로 비칠 수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민중의 에너지가 팽배해지는 속에서 그런 도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천안문 사건을 추모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의지도 그런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중 대 친중'의 코드로 천안문 사건을 대하는 중국 지도부의 태도는 그런 점에서 본질을 비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76년과 1989년 천안문 

지금의 중국 정권은 멀게 보면 마오쩌둥(모택동)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고, 가깝게 보면 덩샤오핑(등소평)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 덩샤오핑에게 정치적 기반이 됐던 것 중 하나가 1976년 천안문 사건(제1차 천안문 사태)이었다.

이 사건은 마오쩌둥의 가부장적 독재에 대한 민중의 염증에서 비롯됐다. 그해 4월 4일과 5일 천안문 광장에 모인 민중들은 1월 8일 사망한 저우언라이(주은래)를 추모함과 동시에, 개혁파인 덩샤오핑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

중국 민중의 눈에 이 두 사람은 마오쩌둥과 최측근 4인방의 극단적 행태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수호자였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에 대한 지지를 표시한 것이다.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학 교수의 <덩샤오핑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4월 4일에는 톈안먼 광장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대략 200만 명이 넘었다). 사람들은 저우언라이에게 헌사를 바치고 사인방을 반대했으며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하고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4월 7일에는 덩샤오핑도 실각시켰다. 하지만 이는 머지않아 뒤집혔다. 5월 11일 심장발작을 일으킨 마오쩌둥은 9월 9일 사망했고, 10월 6일에는 최측근이었던 4인방이 체포됐다. 덩샤오핑은 이듬해 7월에 이전 지위를 거의 회복했고, 이에 따라 1976년 천안문 사건은 반혁명 운동이 아니라 혁명운동으로 재규정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천명한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는 1976년 사건을 혁명으로 재규정하는 속에서 1978년 12월 18일 개회했다. 이 회의에 앞서 1978년 11월 15일자 <인민일보>, <광명일보>, <베이징일보> 등은 "1976년 톈안먼(천안문) 사건은 완전히 혁명적인 행동"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개혁개방으로 중국발전을 이룩한 등소평(왼쪽)
 개혁개방으로 중국발전을 이룩한 등소평(왼쪽)
ⓒ 박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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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76년 사건을 '완전히 혁명적인 행동'으로 재규정하면서 공산당을 장악했던 덩샤오핑은 10여 년 뒤인 1989년 사건 때는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그 또한 마오쩌둥이 1976년 사건을 대했던 것과 똑같은 관점으로 1989년 천안문 사건을 대했던 것이다.

1989년 6.4 천안문 사건 때 중국인들은 표현의 자유나 분배의 공정 등을 외쳤다. 특히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된 현실, 중국의 재산이 '전 인민의 소유'가 되지 않고 '소수 특권층의 사유(재산)'가 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이 사건은 중국을 전복하기 위한 '외세의 음모'가 아니라, 중국을 바로잡기 위한 '민중의 음모'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1976년 사건과 동일한 범주에 놓이는 일이었다.

극과 극 관점

하지만 덩샤오핑은 둘을 갈라놨다. 1976년 사건은 혁명으로 규정하고 1989년 사건은 반혁명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1989년에 표출된 대중적 열기를 마오쩌둥 친위세력이 문화대혁명 때 보여준 홍위병의 광기와 연결지었다. 1989년의 대중적 열기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위를 진압한 계엄군 간부들을 접견한 1989년 6월 9일, 덩샤오핑은 "이번 소란은 언젠가는 올 것이었다"며 "이것은 국제적인 대(大)기후와 중국 자신의 소기후가 결정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 진영과 중국 내부의 반혁명세력이 결탁해서 벌인 일이었다고 폄하했던 것이다.

작년 5월 <역사비평>에 실린 하남석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 '1989년 천안문 사건과 그 이후 - 역사의 중첩과 트라우마의 재생산'은 "당시 폴란드를 비롯해 유고슬라비아·헝가리 등 동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은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며 "이 무력 진압은 일반 시민들을 학살한 게 아니라 체제를 지키고 동란을 수습하기 위해 필연적이었다"는 덩샤오핑의 관점을 설명했다.

덩샤오핑는 1976년과 달리 1989년 사건은 중국을 무너트리기 위한 외세의 음모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1989년 사건은 당시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일이었다. 한국(6월항쟁)과 필리핀(피플파워)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동유럽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세계질서가 이완되던 시기에, 중국 민중이 공산당 통치의 모순을 바로잡고자 벌인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중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밀리게 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1972년 미·중 상하이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했고, 이 시스템은 1989년 당시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1980년대 후반에는 세계 민중의 에너지가 급상승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국가권력들은 서로 싸우기보다는 세계 민중의 도전에 공동 대응하는 편이 더 유리했다.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이 탈냉전 모드로 전환된 데는 그런 요인도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세가 중국을 무너트리고자 1989년 천안문 사건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중국 지도부는 덩샤오핑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천안문 사건에 대한 추모를 억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세계 시민들의 파워가 훨씬 고양돼 있다. 민중의 궐기를 외세의 음모로 폄하하는 지도부의 관점이 계속 유지되면, 2019년에 홍콩에서 벌어진 일이 여타 지역에서도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반중 대 친중'의 구도로 천안문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는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89년과 달리 현재는 국제적인 반(反)중국 기운이 더욱 고조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지도부가 사건의 본질을 감추기가 한결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태그:#천안문 사건, #천안문 사태, #톈안먼 사태, #중국 민주화, #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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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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