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제강점기인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지금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배재학당 동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지어진 배재학당 동관. 지금은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과거제 폐지는 조선 양반가의 청소년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입신출세의 공식적인 사다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곳곳에 신식교육기관이 들어섰다. 박동완은 한성 참선방 양사동(현 서울 종로구 종로 6가)에 세워진 관립 양사동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수업연한 3년 과정이었다. 이 학교는 해방 후 효제국민학교로 재개교하고 1996년 서울효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양사동 소학교 심상과를 마친 박동완은 1894년 7월 황실의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고자 정부에서 세운 황실학교가 이듬해 관립 한성사범학교 부속학교로 개편되면서 관립고등소학교가 문을 열면서 입학하였다. 고등과가 설치된 학교는 이 학교밖에 없었다. 재학생은 130~150명이고 교과목은 수신ㆍ독서ㆍ작문ㆍ습자ㆍ산술ㆍ본국지리ㆍ본국역사ㆍ외국지리ㆍ외국역사ㆍ이과ㆍ도화ㆍ체전ㆍ재봉 등을 가르쳤다. 해방 후 서울교동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관립고등소학교를 마칠 무렵 신학제에 따른 4년제 관립 한성중학교가 종로구 화동에 설립되자 그는 여기에 입학하였다. 소학교 졸업생을 입학대상으로 만 17세에서 25세 이내의 학동을 뽑았다. 설립 당시에는 85명이었으며, 교과목은 한문ㆍ국어ㆍ산술ㆍ역사ㆍ지리였다. 한성중학교 1년을 마친 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3년을 수학하였다. 
 
현재 서울 정동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는 근현대 교육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졸업앨범-배재학당 125년의 이야기'전이 열리고 있다.
▲ 졸업앨범 현재 서울 정동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는 근현대 교육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졸업앨범-배재학당 125년의 이야기"전이 열리고 있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그는 1906년 1월 농상공부기수 6품으로 임용되었다. 첫 직장이었다. 그러나 치솟는 학구열로 1년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22세이던 1907년 다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평생 기독교와 함께 해온 그는 이때 기독교와 접하게 되고, 여기서 익힌 영어는 뒷날 미국망명 시기 독립운동에 크게 활용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1895년 조선정부 외아문과 전 8조의 '배재학당합동'이라는 계약을 체결하여 해마다 조선 정부가 추천하는 학생 200명을 받아들여 가르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영어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역사ㆍ지리ㆍ산수ㆍ성경 등 교양과목을 이수했다. 그리고 학당에서 의무화한 아침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여 설교를 들었다. 
 
마량진은 아펜젤러목사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아펜젤러목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앞바다인 마량진에서 그가 탄 배가 일본상선과 충돌하여 익사하였다.
▲ 아펜젤러목사 동상과 추모비 마량진은 아펜젤러목사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아펜젤러목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앞바다인 마량진에서 그가 탄 배가 일본상선과 충돌하여 익사하였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개화사상과 기독교정신의 바탕아래 개화 초기 많은 인재를 키워낸 이 학당은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은 뒤 명필 정학교(丁學喬)에게 현판을 쓰게 하여 아펜젤러에게 전달할 만큼 정부의 관심이 지대하였다. 교과목은 만국지지ㆍ사민필지(士民必知)ㆍ위생ㆍ창가ㆍ도화ㆍ체조 등이었고 교과 외에도 서재필ㆍ윤치호 등이 출강하여 서구민주주의와 의회제도 등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교훈에 해당하는 당훈(堂訓)은 성경구절을 한역한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즉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이웃을 섬기라는 기독교 정신이다.

박동완은 청소년기 근대 서구적인 기초학문을 배우게 된 1세대에 속한다. 나라가 어지러워가는 속에서도 전통적인 관리 선발제도이던 과거제가 없어지면서 신식교육기관이 설립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부모의 덕으로 소년기를 온전히 학구에 바칠 수 있었다.

박동완의 생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배재학당'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층 상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박찬정 학예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바로 위에 보이는 '배재학당(한자표기)'가 고종황제가 하사한 현판이다.
▲ 배재학당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층 상설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이 박찬정 학예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바로 위에 보이는 "배재학당(한자표기)"가 고종황제가 하사한 현판이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무엇보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것은 박동완의 생애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으며 비록 외국인이 세운 학당이지만 기울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역사의식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배재가 이처럼 근대화와 민족운동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배재학당을 설립, 운영한 감리교 선교부와 초대 학당장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 교사들의 헌신적인 교육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배재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선교사와 내외국인 교사들은 배재학당을 단순히 서구학문과 지식, 기술을 가르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배재학당 터와 남궁억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
▲ 배재학당  배재학당 터와 남궁억 선생의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그들은 이런 지식과 학문, 기술과 정신의 밑바탕이 되는 기독교 신앙을 체득하는 선교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 배재학당은 처음 출발부터 "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운 배재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그것을 실천함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민족공동체와 인류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天國)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으로 건학이념과 목표를 삼았다.

따라서 기독교신앙과 선교정신을 빼놓고 배재학당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기독 배재'(Christian Pai Chai) 전통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주석 2)


주석
2> 이덕주, <배재학당사〔通史〕>, 머리말, 학교법인 배재학당, 201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김대중과 4시간 대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