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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49제를 맞이하여 열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인사들. 함석헌과 김대중 등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의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어" 1975년 10월 49제를 맞이하여 열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인사들. 함석헌과 김대중 등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는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의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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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자는 성직자들의 기도나 노동자ㆍ농민들의 애절한 간구에는 귀를 막고, 권력유지와 연장에만 관심을 쏟았다. 박정희는 이들을 여전히 '일부 몰지각' 또는 '좌파'로 낙인하고 여차하면 구속을 능사로 하였다. 성직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4월 18일 천주교 사제단과 정평위가 공동 주최한 4.19 학생혁명 16주년 기념 특별미사를 이유로 정부는 오태순ㆍ최기식ㆍ이계창ㆍ송기인 신부를 연행한데 이어 5월 16일에는 전주교구에서 신부들을 연행하였다.

이에 앞서 2월 24일 윤보선ㆍ정구영ㆍ지학순ㆍ양일동ㆍ천관우ㆍ함석헌ㆍ윤형중ㆍ박형규ㆍ정일형ㆍ조화순 등을 재야인사 10명이 <민주구국헌장>을 발표, 유신헌법 철폐와 고문ㆍ사찰ㆍ폭압ㆍ정보정치 종식을 선언하였다. 이에 동조하고 서명하는 수효가 많아지자 정부는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서명자들을 수사ㆍ연행하고 일부는 구속하였다. 대학가에서 <민주헌장>을 낭독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종교계와 재야의 '시국선언'과 같은 의례적인 행위를 철저하게 탄압한 것은 유신체제의 경직성 때문이었다. 집권당은 오래 전부터 어용화되고 야당은 중도통합론자가 대표가 되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동아ㆍ조선기자들의 자유언론 선언운동은 권력과 유착한 사주에 의해 대량 해고되면서 지면을 잃었다. 

8월 29일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단이 주최하고 정의구현사제단의 후원으로 '정의구현을 위한 특별 기도회'가 인천 답동성당에서 열렸다. 전국 사제 80여 명과 신자 2천여 명이 참석한 행사는 지학순 주교의 강론에 이어 함세웅 신부의 〈상고 이유서〉낭독 순으로 진행되었다. 

정부는 이 기도회와 관련 인천교구 부주교인 김병상 신부와 황상근 신부를 9월 3일 새벽 연행했다. 황신부는 저녁에 풀려났으나 김신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가 9월 17일 석방하였다. 구속과정이 불법무도한 그야말로 폭거였다. 기도회에서 신자들에게 나눠준 〈상고 이유서〉를 회수하기 위해 통ㆍ반장과 경찰이 동원되고, 각급 학교에서는 기도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조사하여 문책하는 등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답동성당에서는 김병상 신부가 석방될 때까지 매일 사제 40여 명과 신자 1천 2백여 명이 모여 기도회를 열었다. 9월 12일 인천교구 사제단은 답동성당에서 다시 기도회를 갖고, 2부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우리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라는 성명서를 채택한 후 1주일간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성명서의 세 대목이다.

제단에서 설교하는 성직자의 설교 내용이 성당 안에까지 공무로 들어온 기관원에 의해서 기록되어 상부에 보고되는 일, 천주교 신자라고 해서 이유 없이 회사를 쫓겨나야만 했다는 일 등은 지금 이 땅에서 행해지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현 정부 체제나 법질서에 대해서는 우리가 외치는 인간 기본권의 신장에 입각한 올바른 지적과 우리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실정은 언론의 탄압이 아니고 무엇이며 어처구니없게도 해고되어 거리를 방황하는 160여 명의 기자들은 무엇이 낳은 산물입니까? 

인권이 참으로 침해당하고 있을 때에 교회는 결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말 없는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투쟁하여야 합니다. 세계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신 로이 추기경은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더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독재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어떠한 법에도 불복종 내지는 항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밝히고 이 권리야말로 독재정권의 가르침이나 행위에 반대하는 권리이며 불의와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억압에 대한 도덕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권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동료 사제이자 부교구장이신 김병상 신부님과 수감 중인 다른 많은 형제들이 하루 빨리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요구하는 것은 그분들이 굳게 간직해온 고고한 신념과 그에 따른 모든 언행을 백지화시키고 그분들이 잘못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석방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아니 지금 옥고를 치루시는 그분들의 소원은 결코 그런 식으로 해서 석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정부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회심의 표지로 김 신부님과 수많은 애국인사들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 앞에 또 다시 이 기도회를 엽니다. (주석 1)


주석
1> <암흑 속의 횃불(2)>, 338~339쪽.(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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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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