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양평군 한계순의 묘 봉분 앞에 묘갈이 보인다.
▲ 한계순의 묘 양평군 한계순의 묘 봉분 앞에 묘갈이 보인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양평군 한계순과 28세 영의정 이준·동갑내기 병조판서 남이는 어떤 악연이 있을까.

집 주변을 우연히 걷다가 표지판을 보고 생소한 역사의 인물을 접했다. 그래서 궁금증이 더해, 집에 와 자료를 찾고 인터넷 검색 사전을 통해 인물탐구를 했다.

집 주변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로 이사를 온 지, 6개월쯤이 지났다. 왕숙천을 끼고 사방으로 산있고, 국립수목원과 광릉이 7km 정도에 있어 그곳까지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지형을 익히기 위해 휴일이나 공휴일을 이용해 자주 걷고 있다. 요즘 지하철 진접선도 개통이 돼, 서울을 나가기도 한층 교통이 편리해졌다. 진접역에서 공사가 한창인 '지하철 진접기지'를 향해 5분 정도를 걸으면 '역사표지판'이 나오는데 '양평군 한계순 묘역'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묘역으로 가는 입구는 철망문으로 굳게 잠겼었다. 철망문 지근거리에 있는 '자동차운전학원'에서는 수강생들이 운전 연습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양평군 한계순의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명문이 있다.  위로 올라가면 양평군 한계순의 신도비가 나온다,
▲ 설명 표지판 양평군 한계순의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명문이 있다. 위로 올라가면 양평군 한계순의 신도비가 나온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다른 길목을 이용하니 진접선 차량기지 2공구 현장사무실 쪽이 나오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바로 길 경계에 '양평공 한계순 묘역의' 설명 표지판이 나왔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제102호'라고 표기됐고, 조선 초기 문신 한계순(1431~1486)의 묘라고 돼 있다.

설명 표지판 바로 위에 230cm 높이의 화관석(花冠石) '양평군 한계순 신도비'가 서 있다. 비문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한양평공묘갈명(韓襄平公墓碣銘)'이라고 적혔다. 묘역 가장 위에 있는 한계순의 봉분 앞에 묘갈(묘표)이 세워져 있다. 묘갈(墓碣)은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을 의미한다.

양평군이 사망한 해인 성종 17년(1486년) 세웠다. 한계순의 묘 아래 정경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있다. 한계순은 어질고 온화하며 평소 거동이 예의 있고, 단정했으며, 일을 신중히 처리하고 사람을 공손하게 대했다고 '설명 표지판'에 설명돼 있다.
 
한계순의 묘 아래 부인 안동 권씨의 묘이다.
▲ 한계순의 부인 안동 권씨 묘 한계순의 묘 아래 부인 안동 권씨의 묘이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묘역은 관리가 허술해 잘 단장되지 않았고, 후손들이 잘 관리를 하지 않는 탓인지 허름하고 남루한 묘역에서 세월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문화재 자료 제102호'로 지정이 돼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한 지자체의 관리도 허술해 보였다.

그럼 '한계순'은 어떤 사람일까. 이곳 설명 표지판에 적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개국공신 한상경의 손자이고 함길도 관찰사인 한혜의 아들이라고 돼 있다. 성종 때 좌승지, 공조판서, 승정대부를 지냈다. 특히 이곳 표지판에는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는데, 남이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이 돼 청평군에 봉해졌다는 말이었다.

남이 옥사는 예종 1년(1468년) 때, 남이와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역모로 처형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가 충무공 남이(南怡, 1441~1468) 등의 옥사를 잘 다스려 청평군에 봉해졌다는 의미였다. 후손들에게 남이 장군으로 잘 알려진 그는 현재 춘천 남이섬에 묘가 있다.

남이는 조선 개국공신이고 영의정을 지난 남재(南在)의 현손이고, 태종의 부마인 의산군 남휘(南暉)의 손자다. 부친 남빈까지는 왕족 대우를 받았고, 세조와는 아주 가까운 외척이기에 조선 전기 명문가 집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스물이 되기 전인 1460년에 문과가 아닌 무과 급제했고, 남이의 장인은 세조 때 일등공신인 권람이었다.

권람은 한명회,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측근이었다.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는 병마도총사에 구성군 이준을, 주요 지휘관에 남이 등을 임명했고, 남이를 역모로 몰았던 서출인 갑사 유자광도 이시애의 난에 참전해 진압에 성공했다. 왕족인 구성군 이준과 남이는 동갑내기였고 이런 공을 인정해 세조는 28세 때 이준은 영의정, 남이는 병조판서에 등용했다.

그해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한다.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한 예종은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좌천했고, 유자광이 숙직을 하며 남이가 '혜성이 출현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나타나게 할 징조'라고 했다는 역모 고변에 역적이 됐다. 여기에 더해 여진족 정벌시 남이가 읊었던 '북정가(北征歌)'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의 물은 말에 먹여 없애리)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편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오)


여기에서 세 번째 구절인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을,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으로 '평(平)을 득(得)'으로 바꾸어, 유자광이 고변한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해석되면서 역모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비참한 거혈형에 처해진다. 바로 훈구대신들에게 편승한 유자광의 조작 역모가 그를 죽게 한 것이라고 역사는 평하고 있다.

그래서 양평군 한계순은 남이가 역모로 옥에 가둬 고문을 당할 때와 거혈형으로 죽을 때까지 잘 관리를 했다는 의미로 공신에 오른 것이다. 한계순은 칠삭둥이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살며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임금 측근에서 활약했던 한명회의 조카이기도 하다. 현재 압구정동의 '압구정'은 한강에 날아다니는 기러기를 본다는 의미로 한명회의 정자에서 유래됐다.
  
묘역 입구에 서 있는 양평군 한계순의 신도비이다.
▲ 양평군 한계순의 신도비 묘역 입구에 서 있는 양평군 한계순의 신도비이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또한 한계순은 성종이 즉위하고 1470년 불거진 '구성군 이준'에 대해 왕위찬탈 구설수에 휘말린 권맹희 설화를, 진실인량 한명회 등 후구파 대신들을 대변해 권맹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충무공 이준은 한 적도 없는 설화에 의해 역모로 항해도 옹진으로 유배를 갔고, 9년 후인 1479년 1월 옹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됐다. 여기에도 한계순이 이름을 올렸다.

그에 대한 공과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영의정 올랐던 충무공 이준을, 성종이 즉위하면서 역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예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충무공 남이가 옥에 가둬 고문을 당하고 죽을 때까지를 지켜본 사람이 '양평군 한계순'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태그:#양평군 한계순 묘역, #충무공 이준과 남이 악연, #진접읍 양편군 한계순의 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