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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창간호
 민족일보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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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 동안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상장에 "품행이 방정(方正)하고"라 하였다. 풀이하면 "모가 나고 정의감 있는"이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가 난다'는 말은 사람의 평가에서 위험인물 또는 기피인물로 부정적이 되었다. 반대로 '동굴게' '둥글둥글하게'가, '황희정승처럼' 행동하는 것이 처세의 달인처럼 인식되었다.(사실은 황희정승을 욕되게 한 말이다)

김자동은 특별히 모가 나거나 정의감이 강한 성품이 아니었다. 다만 글을 배운 사람으로서 '상식대로' 말하면서 처신하였다. 그러다보니 불이익이 많았고 고빗길도 적지 않았다. 어머니의 지적대로 "고지식하달까, 강직하달까, 좀처럼 남에게 머리를 수그리지 않고 타협할 줄 모르는…." 기질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기질'이 대접받아야 하는 데도 한국사회는 그러지 못했(한)다.

가족을 봉양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있어야 했다. 지우 관계가 넓어서 각계에 절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민족일보> 퇴사 후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무또(Mutoh)에서 만든 제도기 판매 일을 하게 됐다. 전국을 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는데 한번 외판을 나가면 1,2주씩 집을 비우곤 했다. 집에 전화도 없는 데다 요즘처럼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울산이 한창 개발될 때여서 울산에 며칠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더니 <대한일보>에 발령이 났다고 했다. 알고 보니 오소백 부국장이 내 허락도 없이 낸 것이었다. (주석 7)

뒷날 한양대 총장을 역임한, 음악가이기도 하는 김연준이 <평화신문>을 인수, 1961년 2월 1일자로 <대한일보>를 제호를 바꿔 재창간했다. <민족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오소백이 <대한일보>의 부국장으로 가면서 김자동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취직하기가 어렵다보니 어디에 자리가 하나 났다고 하면 사방에서 부탁이 들어오고 난리법석이었다. 오소백이 그 자리에 나를 앉힐 요량으로 내 허락도 없이 사전발령을 내버린 것이었다. 나로선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대한일보>에서 1년 정도 근무했다.

<대한일보>는 1963년 5월 2일 김연준 사장이 업무상 횡령 및 알선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해 5월 16일자로 폐간되었다. 수재의연금 중 일부를 사원 봉급이나 회사 운영비로 유용했으며, 또 윤필용 당시 수경사령관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열린 선고공판에서 그는 혐의 두 가지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주석 8)

방자한 정치권력이 칼춤을 추던 계절이어서 찍히면 파멸이었다. 김연준 사장은 무죄로 판결되었지만, 그 전에 신문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김자동은 또 한 번 정치폭력에 의해 신문사의 숨통이 끊기는 참사를 겪어야 했다.

언론계에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는 심정을 굳히고 있을 즈음, 미국 연수시기에 지면을 튼 한국인 최초의 언론학 박사 장용이 어느 날 찾아왔다. <일요신문>을 창간하면서 취재부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장용은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런데 신문이 나오고 나서 얼마 정도 지난 후부터 사장과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듣기로 사장은 중앙정보부 제2국장을 지낸 석정선의 부친이었는데 공화당에서 돈을 댔다고 했다. 그러니 박정희 군사정권 비판 같은 것은 보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저런 부당한 요구도 적지 않았다. 

결국 입사한 지 한 달여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내가 나올 때 장용도 함께 그만두었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로 가서 신문방송학과를 만들었다. 리영희를 한양대 교수로 영입한 것은 장용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주석 9)

김자동은 환멸을 느끼며 언론계를 떠났다.


주석
7> <회고록>, 402~403쪽.
8> 앞의 책, 403쪽. 
9> 앞의 책, 40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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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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