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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4년, '낙태죄'의 법적 효력이 사라진 지 3년차가 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국가가 조건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마련, 건강보험 보장, 유산유도제 도입을 미루고만 있다. 임신중지에 사용하는 약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지정한 필수핵심의약품이며, 올해 약을 승인한 아르헨티나와 일본을 포함해 현재 전 세계 95개국에서 안전하게 사용하고 있다. 유산유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은 특히 비용이나 노동 조건, 연령, 장애, 국적 등의 이유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낮거나 폭력 피해에 처한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지난 6월 15일 '유산유도제 도입 촉구 다수인 민원 보내기 캠페인'을 마무리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모두를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을!" 기고글을 연재한다.[기자말]
실종된 임신중지를 찾습니다

'필수의료'가 매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의료 행위의 양은 막대한데도 정작 주관적 건강상태는 최하위를 밑돌고, 병상 수는 세계 1,2위를 다투지만 공공병상 수는 꼴등인 한국 의료의 아이러니는 시장에 내맡겨진 의료체계에 기원한다.

병상과 인력을 포함한 의료자원의 공급부터, 의료서비스의 제공 범위마저 시장의 작동에 맡겨져 있는 이 체계의 모순은 이제 극한에 치닫아, 이제는 병원이 빼곡한 도심 한복판에서도 생명이 스러지게 만들 정도로 곪아 터지고 있다. 그야말로 '의료 붕괴'다.

한편 정부가 '필수의료'를 이야기할 때 임신중지와 재생산 건강을 위한 보건의료체계의 대안은 아예 실종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임신중지 의료 현장에서 드러나는 건강권의 공백은 앞서 이야기한 시장주의 의료체계가 유발한 모순의 단면이며, 어쩌면 가장 외면당하고 있는 영역일 것이다.

지금 한국의 임신중지처럼 어떠한 형태로도 시장에 대한 공적 개입이 미비하고, 질 관리가 부재하며, 공공 재원이 투여되지 않는 의료행위가 또 있을까? 비범죄화 이후 4년이상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국회와 제도권 정치의 책임 방기, 스스로 움직일 줄 모르는 정부기관들의 행태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건강을 시장의 작동에 내맡기는 꼴이었고, 그 결과 임신중지는 극단적으로 상품화되어 있다.

현재 임신중지 의료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의료기관별로 제각기 높은 가격표가 달린 '상품'이며, 시민들은 권리주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구매력을 입증해야 하는 소비자로 치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의료기관도 체계적으로 조직되어있지 않아,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헤매야 한다. 얼마를 지불해야 할 지 모르는 채로 병원에 가고, 부르는 값을 치러야 한다. 높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2022년 9월 ‘모임넷’은 보건복지부에 찾아가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서한과 시민 서명부를 전달했다.
▲ 유산유도제 도입, 건강보험 도입 복지부가 나서라! 2022년 9월 ‘모임넷’은 보건복지부에 찾아가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서한과 시민 서명부를 전달했다.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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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유도제 도입마저 시장에 내던져버린 정부

높은 시술비용이 부담되어 유산유도제를 찾아 나서는 경우에도 쉽지 않다. 유산유도제는 승인되지 않아 공식적인 처방과 복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의약품 공급체계도 마찬가지로 시장에 내맡겨져 있다. 유산유도제같은 약이 새로 한국에 진입할 때, 민간 제약사가 도입신청을 하지 않으면 도입 논의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도입만 문제가 아니다.

현대약품이 미프지미소 도입 신청을 했을 때 일각에서는 비급여로 30만원의 약가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산유도제(미페프리스톤, 미소프로스톨 콤비팩)의 원가는 미화 1달러에서 3달러선까지로 수천원대에 지나지 않음을 고려하면 폭리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뭘 했을까? 합리적 가격의 동일성분의 다른 제품을 공적으로 도입할 방안을 모색한다거나, 하다못해 민간 제약회사에 약가를 협상하거나, 건강보험 도입 방안을 고민하기는 커녕 오히려 현대약품이 자진취하할 때까지 정부는 승인 절차조차 비정상적으로 미뤘다.

결국 국내에서는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성에 상당한 장벽이 형성되어 있고, 이에 의료진들도 최적의 임신중지 의료를 제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컨대 건강상의 조건으로 인해 외과적 임신중지가 불가능한 사람의 경우, 약물적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은 필수적이다. 유산유도제가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가로막히는 심각한 건강권 침해에 직면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 수술적 임신중지도 비급여로 비용이 만만치 않고, 유산유도제도 도입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상황을 파고들어 검증되지 않은 유산유도제를 판매하는 암시장이 성행하고 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다가 암시장을 통해 성분미상의 약물을 구매하고 복용한 사람이 부작용과 합병증을 겪게 된다면 그 개인을 탓할 수 있을까? 유산유도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한 어떠한 공공의 체계도 마련하지 않고, 끝내 암시장으로 스스로 키운 것이나 다름 없는 국가의 탓이 크다고 본다.
 
2023년 ‘모임넷’은 건강권 보장으로서 임신중지를 요구하며 대통령실 앞 행진을 진행했다.
▲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 2023년 ‘모임넷’은 건강권 보장으로서 임신중지를 요구하며 대통령실 앞 행진을 진행했다.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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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에 공공성을!

산부인과의사회는 임신중지가 건강보험법의 목적(제 1조)인 '국민의 질병·부상에 대한 예방·진단·치료·재활과 출산·사망 및 건강증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피부미용이나 성형수술과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럴까?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 학계에서는 임신중지를 공중보건이 확보해야 할 필수적인(essential) 의료서비스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나 질병의 부재가 아닌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로 정의하며, 임신중지가 이러한 총체적 건강의 달성을 위해 보건의료체계로서 갖춰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안전하고, 시기적절하며, 저렴하고, 사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임신중지 의료에 대한 접근이 부족할 경우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안녕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의 건강과 인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임신중지에 관련된 정확한 정보, 임신중지 의료 및 사후 건강 관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임신중지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세계산부인과학회(FIGO)는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는 만성적인 공중 보건 문제이자 인권 문제라고 규정하며, 안전한 임신중지에 접근할 권리는 보편적 건강보장의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국 산부인과의사회의 주장은 국제기구는 물론 국제 산부인과학계, 공중보건학계와는 상당히 괴리된 주장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시장주의 의료체계가 형성하는 의료인들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이다.

비범죄화를 이끌어낸 시민들은 임신중지를 의료행위로서 차별없이 제공받을 것을 줄곧 요구해 왔다. 권리가 행사할 수 있는 실체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보건의료체계의 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당면과제 중에는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것이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은 건강과 안녕에 직결되는 것이므로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어야 할 당위는 충분하다. 실증적인 사례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의료민영화의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에서는 임신중지를 원하는 사람의 반가량이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임신중지는 다른 의료적 처치에 비해서 보험으로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1분기임신중지의 1/3이상, 2분기 임신중지의 반 이상에서 월소득의 1/3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가난할수록 임신중지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임신중지를 더 미룰 수밖에 없게 만들어 건강을 위협한다. 하물며 한국처럼 보편적 국민건강보험이 버젓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임신중지 시술뿐만 아니라 유산유도제 또한 조속한 도입과 동시에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임신중지 의료를 전달할 체계를 공공보건의료체계로서 마련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산부인과 의료 인프라의 공급 또한 시장에 맡겨져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지역간 편차가 심하다. 산부인과 공공 클리닉을 진료권마다 구축하여 임신중지를 포함한 재생산권리를 위한 공공보건의료체계를 마련하는 등 근본적이고 담대한 정책 구상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구들은 인간적 삶의 권리로서 임신중지가 보장되기를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계속될 것이다. 아직도 말해지지 못한 임신중지의 경험들은 더 많이 말해지고, 실현되지 않은 요구들은 더 많이 외쳐질 것이다. 의료를, 건강을, 재생산을 상품화하는 지금의 시장법칙은 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기껏해야 수십년 된 이 시장의료의 역사보다, 삶과 존엄을 위해 임신중지를 시도해왔던 인류의 역사가 훨씬 길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기 위한 자원과 기술은 이미 충분히 갖춰져 있다. 갖춰지지 않은 것은 권력자들의 책임 뿐이다. 이 무책임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바꿔낼 힘은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원하는 모두에게 있다고 믿는다. 비범죄화를 넘어 권리로서,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재생산 건강을 위한 공공의료 체계를 요구한다. 유산유도제 도입과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은 그 시작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입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6월 23일까지 식약처에 보낼 다수인 민원을 모으고 있다. 진정서를 https://bit.ly/미프진진정서 에서 내려받아 서명한 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17길 14 엘림빌딩 3층)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이 글의 필자는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입니다.


태그:#임신중지, #권리 보장, #유산유도제, #건강보험, #산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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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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