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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883년 김옥균(사진 맨오른쪽)에게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직위를 주고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여업무를 겸하게 하였다.
 고종은 1883년 김옥균(사진 맨오른쪽)에게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직위를 주고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여업무를 겸하게 하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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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위기는 다가오는데 개화파는 대부분 백면서생들이다. 조선사회는 세도가의 성씨가 바뀌어도 봉건적 전횡과 주자학적 교조를 바탕으로 하는 지배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념과 질서에 반하면 어김없이 사문난적으로 몰아쳤다. 서서히 밀려오는 외세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받을지 모르는 내부의 '이단자'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김옥균의 고민은 깊어갔다. 할 일이 많은 데 힘이 없었다. 그래서 기존질서에 참여하여 힘을 기르고자 했다. 관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패하기는 했으나 과거에 응시하는 길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여 22세 되던 1872년 2월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후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여 30세 전에 쟁쟁한 나라의 청년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김옥균의 뛰어난 학식과 식견은 서울 장안에서 이름을 떨치던 청년 수재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였으며 이 소식은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에까지 알려져 조야가 김옥균을 주목함에 이르렀다.

김옥균은 당시 정치계에서 진보적 중심을 이루고 있던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선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지는 선각자들로서 점차 하나의 정치적 세력을 꾸리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주석 5) 

김옥균은 장원급제한 날, 고종과 처음으로 만났다. 임금이 친히 합격자에게 내리는 정6품에 해당하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일신상의 이유로 잠시 공무에 물러났다가 그해 7월 사헌부 감찰직에 이어 사헌부 지평, 2년 뒤 홍문관 교리가 되어 10여년 간 시독관으로 근무하면서 임금에게 경서를 강독하는 경연(經筵)을 담당하였다. 임금을 매일 대하기에 실권은 없으나 실세로 통하는 관직이었다.

그가 개화사상이 아닌 정통유학자라면 출세길이 훤히 열리는 직위였다. 이목구비가 훤칠한데다 총명하고 학문이 깊어서 능히 고관대작에 입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화성도 대단하여 한 번 사귀면 진중한 벗이 되었다.

그는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사교에 능한 그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했다.

"그는 곧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이는 반상(班常)의 한계를 뛰어넘어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조선의 개화를 주도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충의계는 명목상 친목계였으나 사실은 정치결사체인 개화당에 가까웠다."(주석 6) 

사가들은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원인의 하나로 조급성을 든다. 그런 측면도 없지 않지만 그의 성품이나 행적을 살펴보면 조급성보다는 오히려 차분히 준비하고 행동하는 진중한 모습을 보인다. 동지이던 서재필의 회상이다.

나는 그(김옥균)가 대인격자였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 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서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晝晝夜夜)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었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주입하고 일신(一新)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나 일반 사회의 구투 인습을 일변시켜야 할 필요를 확각하였다. (주석 7)

김옥균이 관가의 일우에서 '충의계'를 조직하는 등 개화의 세력화를 시도하고 있을 즈음 국내외의 주요 사건을 보자.

1873년, 최익현 대원군을 탄핵하고 제주도에 유배, 고종 친정을 선포,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 시작, 박규수 우의정이 됨

1875년, 일본군함 운야호 영종도 포격

1876년, 강화도에서 불평등 한·일조규조인, 명화적 발생, 제1차 수신사 김기수 일본 파견 

김옥균은 1874년 11월 홍문관 교리에 있으면서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펴냈다. '조선과 일본의 최근사정'이라는 뜻의 이 책에서,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정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상제도의 폐지와 고른 인재등용, 화폐개혁·철도부설과 기선의 도입 등 뒷날 <갑신정변 정강>의 핵심이 담긴다.

개화인사 지석영(池錫永)이 고종에게 보내는 상소문에서 김옥균의 이 저서가 나라를 개화시키기 위한 시대의 절박한 임무를 계발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므로 이를 널리 보급시킬 대책을 취할 것을 제기했다. 


주석
5> 김석형, 앞의 책, 18쪽.
6> 신동준, 앞의 책, 23쪽.
7>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2), <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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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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