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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된 옥수수의 신선도가 떨어지면 아예 하루 영업을 포기한다고 한다. 이는 손님과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라고 했다.
 납품된 옥수수의 신선도가 떨어지면 아예 하루 영업을 포기한다고 한다. 이는 손님과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라고 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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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계절 중 여름이 가장 싫다. 차라리 땀을 흘리는 건 괜찮지만, 몸이 끈적거리는 느낌이 너무 싫다. 무엇보다 모기 때문이다. 모기에 물려 가려운 것도 싫지만, 잠자리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그 모기를 때려잡기 전엔 절대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름이 기다려지는 구석이 아예 없진 않다. 휴가를 활용해 좋아하는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 설령 여행을 못 가더라도 며칠간 쾌적한 에어컨 아래에서 책을 읽고 글 쓰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언젠가는 휴가 내내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다.

무엇보다 여름은 옥수수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계절이어서 좋다. 세계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대부분이 가축의 사료로 쓰인다는 이야기에 괜히 화가 날 만큼 좋아한다. 솔직히, 만성적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의 주식이 옥수수라는 점조차 안쓰럽기는커녕 부러울 정도다.

주방 냉동고엔 낱개로 진공 포장된 옥수수가 수북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옥수수를 찾는다. 직접 산지에서 옥수수를 먹어볼 요량으로 휴가 때 강원도를 부러 찾아간 적도 있다. 찜솥에서 모락모락 퍼지는 달큼한 그 풍미를 잊을 수 없다.

놀라운 옥수수 맛집, 암호 같은 주문의 비밀
 
이곳이 '드라이브 쓰루' 방식의 원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출근길 옥수수를 사가는 차들이 줄을 이었다.
 이곳이 '드라이브 쓰루' 방식의 원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출근길 옥수수를 사가는 차들이 줄을 이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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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옥수수 맛집'을 우연히 알게 됐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집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듯한 거리였다. 놀라운 건, 맛집이라는 사실보다 그곳을 옥수수에 죽고 못 사는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인들에게 자랑삼아 소개했더니, 아직 몰랐느냐면 되레 면박만 당했다.

다들 옥수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알이 굵고, 맛있고, 싼 곳으로 소문이 자자하단다. 사장님을 일러 오직 옥수수로 일가를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순간 옥수수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사장님의 삶이 궁금해졌다.

지난주 화요일 아침, 몇 차례의 헛걸음 끝에 사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퇴근 후 찾아가면 이미 가게 문이 닫혀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손 글씨로 판매가 완료됐다고 적은 팻말만 걸려있었다. 이곳이 맛집이라는 건, 입구에 수북이 쌓여있는 옥수수 껍질 더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요청에 시답잖다는 표정이었다. 정신없이 바쁜데 귀찮게 굴지 말라는 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다 쪄진 옥수수를 소분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건네느라 한 시도 앉아 있지 않았다. 묻고 답하는 내내 그의 눈과 손은 옥수수를 향해 있었고, 오로지 입만 나를 응대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손님이 줄을 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른바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구매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창문을 열어 현금과 옥수수를 맞바꾸는 형태다. 사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드라이브 쓰루' 방식을 도입한 거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검은 걸로 두 개요."
"중간 걸로 셋이요."
 

손님의 주문은 언뜻 암호 같았다. 단골이어선지 사장님은 옥수수가 담긴 봉지만 건넬 뿐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주문의 의미를 물으니,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옥수수에 관한 박학다식한 지식을 쏟아냈다. 품종부터 구별법, 찌는 요령, 보관 방법까지 한 편의 '옥수수 강좌'였다.

그는 만 9년 동안 옥수수와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옥수수가 나오는 여름 한 철 장사로 생계를 꾸리는 게 쪼들릴 법도 한데, 되레 너무 주문이 많아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전국에 단골이 3000명을 넘는다며, 당일 각지에 택배로 보낼 물량을 기록한 장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중엔 서울, 경기, 부산 등지뿐만 아니라 옥수수의 주산지인 강원도와 충북 지역의 주문서도 눈에 띄었다. 한 아파트 단지의 담벼락 아래에서 시작한 옥수수 장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져 주문이 밀려든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가 조금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

오전 3시부터 준비...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돼"
 
가게 안 다섯 개의 압력솥이 연신 김을 뿜어내며 요란스러웠고, 사장님은 다 쪄진 옥수수를 소분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가게 안 다섯 개의 압력솥이 연신 김을 뿜어내며 요란스러웠고, 사장님은 다 쪄진 옥수수를 소분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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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물량을 대체 어떻게 조달할까. 가게의 문을 3시에 연다고 했다. 물론, 오전 3시다. 농산물 공판장에 서둘러 가서 좋은 물건을 다량 확보하는 게 관건이라는 거다. 어떤 농산물이 안 그러랴마는, 애초 옥수수가 싱싱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맛을 낼 수가 없단다.

그는 좋은 물건이 없으면 아예 하루 장사를 포기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공판장에 납품된 질 낮은 옥수수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번 껍질을 벗겨 확인할 필요도 없이 수확한 지 오래된 것이라고 단언했다. 맛도 없고 식감도 떨어진다며, 이런 걸 파는 건 범죄와 다름없단다.

먹는 것으로 장난을 치면 되겠느냐며, 양심상 못 할 짓이라고 연신 강조했다. 하루 장사하고 말 게 아니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게 철칙이란다. 하긴 며칠 전 헛걸음했을 때, 문 앞에 '판매가 불가능한 상태여서 하루 휴업한다'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가게 안에는 큼지막한 압력솥 다섯 개가 종일 거센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화에 방해가 될 만큼 압력솥은 추 딸랑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 오전 3시에 가게 문을 연다고 하니, 주변 이웃들에게 적잖이 폐가 될 듯도 하다. 가게가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한 단골손님의 말에 따르면, 처음 아파트 단지 담벼락 아래에서 장사할 당시 일부 주민들이 여러 차례 소음 관련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가게를 외진 이곳으로 옮겨온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지금 해당 아파트 주민들은 사장님이 떠난 걸 서운해한다고 전했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

먹어본 옥수수 중에 가장 맛있다고 추임새를 넣었더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꾸했다. 영업 비밀이라면서도 맛을 내는 특별한 비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좋은 옥수수를 고르는 게 전부라는 거다. 찔 때 첨가물을 과용했다간 되레 옥수수 본연의 맛을 잃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경험에서 배운 판매 전략이라며 한마디 보탰다. 맛이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에 일절 재고를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에 팔 양만큼만 찌고, 남으면 그날 바로 이웃에게 떡 돌리듯 선심을 쓴다는 거다. 그걸 손해 봤다고 생각한다면 장사를 접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다.

헤어지며 과일 노점으로 벌이를 시작했다는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다. 가난 극복의 서사를 기대했다. 하다못해 매일 새벽 집을 나서는 남다른 부지런함이나 밤낮이 바뀐 생활을 견뎌내는 강철 체력, 손님과의 신뢰를 하늘같이 여기는 상도 같은 교과서적 답변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바보 같은 우직함'을 첫손에 꼽았다. 그는 9년 동안 줄곧 한 우물만 판 걸 뿌듯해했다. 한 지역에서 오로지 옥수수만 상대했다는 게 유일한 성공 비결이라는 거다. 만약 하루하루 수입에 일희일비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고 확언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아는 거라곤 옥수수밖에 없다고 했다. 질문의 내용은 달라도 그는 옥수수의 품종과 특성, 맛, 보관법 등을 비유하며 설명했다. 그것들은 모두 책이나 수업을 통해 배운 게 아니라 오랫동안 일상의 삶 속에서 체득한 것이기에 가슴에 와닿아 묵직한 깨달음을 준다.

이젠 매일 이른 아침 '옥수수 전문가'를 찾아가는 게 루틴이 됐다. 적어도 옥수수가 출하되는 초가을 무렵까지는 반복될 일상이다. 오늘도 옥수수를 먹으며 연일 계속되는 폭염을 견디고 있다. 몸은 끈적거리고 모기 윙윙거리는 이 여름, 옥수수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싶다.
 
가게 입구에는 새벽 3시에 영업을 시작한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처음엔 오후 3시인 줄로 알았다.
 가게 입구에는 새벽 3시에 영업을 시작한다는 팻말이 붙어있다. 처음엔 오후 3시인 줄로 알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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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수수, #광주광역시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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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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