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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후쿠시마의 아이'였던 한 소녀가 던진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12년이 지나 성인이 되었을 그 소녀는 엄마가 되어 있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사는 ‘그들’은 안녕할까요? ‘그들’의 삶, 일상, 활동과 목소리를 따라 ‘우리’로 얽힌 사람들, 그 인연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연결될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원불교환경연대 탈핵기록단이 한 달에 한 번, ‘그들’과 ‘이웃’을 만나러 갑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말들을 곱씹다 보면 어느 지역의 문제, 그들만의 문제라고 덮어두지는 못할 겁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잠깐만 내주세요.[편집자말]
1969년 대한민국 최초의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전국 10개 후보지 중 고리가 최종 결정되었을 때만 해도 주민들은 전기 공장 하나가 마을에 들어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핵발전소는 그들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결국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1969년 고리 핵발전소 건설로 고리 마을에서 살던 162가구 중 대부분은 온정마을과 골매마을로 집단이주하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1969년 11월 늦가을에 골매마을로 떠밀려 온 사람들에게 정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논과 밭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강제 이주나 다름없었다. 집도 없이 군용 천막에서 살게 된 그들은 먹고살 것이 없으니 바다로 뛰어 들어가 먹고 팔 것들을 채취해야 했다. 잠수복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입던 것 그대로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받은 보상금으로 집을 하나둘 짓기 시작하였다. 자기 삶의 터전과 고향마저 잃은 사람들, 그들의 곤궁과 힘듦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다를 생계로 삼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업권입니다. 애초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집단이주한 사람들의 어업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분쟁 끝에 최소한의 어업권을 가지게 된 주민들은 바다와 약간의 땅을 경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하며 살기 시작했는데, 신고리 핵발전소를 짓는다고 해서 이들은 다시 쫓겨나게 됩니다. 골매마을로 이주한 할머니는 매일 고리를 바라보면서 "고리에 가고 싶다, 고리에 가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말씀도 "고리에 가고 싶다"였다고 합니다. 핵발전소 때문에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한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7월 22일 방문했던 골매마을은 고리 핵발전소에서 너무 가까웠다. 논, 밭, 바다, 집, 골목 등 마을 어디에서도 핵발전소 돔이 보일 정도였다.

고리 핵발전소에 이어 신고리 1·2·3·4호기 핵발전소까지 확대되어 새롭게 지정된 부지에 골매마을이 다시 포함되었다. 주민들은 집단이주 후에도 신고리핵발전소 1·2호기와 3·4호기 공사를 지켜보았는데, 숱한 발파작업으로 인한 소음과 분진에 시달렸다.
 
골매마을 골목에서 본 고리핵발전소 돔
 골매마을 골목에서 본 고리핵발전소 돔
ⓒ 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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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건설 공사를 승인받기 전인 2015년부터 주민들이 반대하는데도 수중 취·배수구조물 축조 공사를 불법적으로 강행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경작 중인 작물을 수확하라며 결국 이주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장영식은 두 번이나 잔인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그들을 '슬픈 유민(流民)'이라 불렀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고향'이라는 개념, 감각이 거의 없잖아요. 한 70대 이상 넘어가야, 고향이나 마을에 대한 감각이 있을 텐데. 저도 60대지만, 사실 고향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요. 고령의 주민들은 고향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상처가 굉장히 큰 거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핵발전소로 인해 뿌리 뽑힌 거니까. 그만큼 1세대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남다른 거죠.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서 겨우 정착한 마을에서 살 만하니까 또 쫓겨난 말도 안 되는 폭력의 역사를 겪어오신 거죠.     

'공공성'과 '개발'의 이름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핵발전소를 짓기 위해 누군가의 삶과 평생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러한 국가폭력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만들어진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해 쉽게 정당화되곤 했다. 전력 생산과 공급의 중요성을 내세워 송전탑과 핵발전소를 세웠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삶과 권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채 그저 개개인에게 전가되었다.

뒤늦게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지만, 갈등이나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기보다는 '보상'과 '지원금'으로 갈등을 무마하거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은 불행히도 주민들 사이로 다시 옮아가기 일쑤였다.

이처럼, 전기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사람이 살던 곳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가동되는 동안, 최인접 마을에서 살던 주민들은 피해와 영향에 알아서 대응하거나 적응하며 살아야 했다. 집단이주를 한 곳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아 입던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거나 힘들게 거친 논과 밭을 새롭게 경작해야 했고,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로부터 어업권은커녕 마을 구성원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삶처럼 말이다.

즉, 핵발전소와 함께 30~40년을 살아간 주민들이 체득하고 경험했던 것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피해와 영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개인화에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도 무책임한 역사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주민들의 선택 하나가 있었다. "핵발전소를 반대하기 때문에 유치한 사람들", 장영식은 이를 '슬픈 역설'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왜?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나 역시 한 주민들이 내건 요구에 어안이 벙벙했었다. 한수원 노동조합만큼이나 더 강렬하게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을 반대했던 사람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지지했던 것일까?

2017년 당시 장영식의 시선도 그들에게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는 2017년 10월 12일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라는 제목의 포토에세이를 작성했다. 장영식은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 중 일부는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 건설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습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건설이 고시될 때부터 가장 강렬하게 반대했던 주민들이 왜 찬성하고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토록 반대했던 신고리 핵발전소 3, 4호기가 이 지역 어디에서도 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집 마당에서도 동네 골목길에서도 바다 위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핵발전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년 전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두려웠던 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 건설 때 온갖 소음과 폭발음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 온갖 짝퉁 부품을 보도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 간에는 신고리 핵발전소 3호기의 문제점과 그 위험성에 대해 귓속말로 주고받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장영식의 기사  "왜 우리가 핵발전소를 찬성해야만 했을까요?" 중 일부

장영식은 "그들은 누구보다 핵발전소를 반대했고 오랜 기간 싸웠으나, 결국 국가가 밀어붙이는 핵발전소를 막아내지 못했다. 때로는 함께 싸웠던 활동가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이웃 주민들에겐 날이 선 말들을 해야 했다"라고 말하며, "신고리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새 핵발전소를 자신들의 마을에 유치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주민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참담한 현실을 기록했고 이해하고자 했다. 핵발전소가 싫어서 핵발전소를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누가, '찬핵론자', '핵마피아'라고 돌을 던지며 '돈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한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꼭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근데, 그걸 현장에도 와보지 않은 전문가들은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그들을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분석하더라고요. 활동가들조차도 그렇고요. 근데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어요.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편하게 쓰는 전기 때문에 희생당한 지역과 고통받아 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얼마만큼 성찰했고 고백했는가"를. 우리는 우리의 안락한 삶과 그들의 희생과 피해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에서 새로운 탈핵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논리와 지식만 가득한 글과 말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장 너머의 삶의 복잡함

장영식이 '슬픈 역설'이라 부르던, 한편으론 잘 이해되지 않는 주민들의 선택을 나 역시 찬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만 생각하고 바라보았으며 그들을 비판하고 나무랐었다. 현장에 와 본 적이 없으니 핵발전소를 유치하는 주민들은 '그저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었고, '핵발전소라는 위험과 편익을 기꺼이 교환'하려는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현장인 그곳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억척같이 살아내야 하는 일상과 삶의 공간이었던 것을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좋고 나쁨, 찬핵과 탈핵의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는 설명할 수도 경계지을 수도 없는 현장 너머의 삶의 복잡함이, 그들 빼앗긴 삶과 역사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골매마을에서 보이는 고리핵발전소
 골매마을에서 보이는 고리핵발전소
ⓒ 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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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식의 질문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얼마나 반성하고 그들 유민의 역사를 이해하려 했는가? 구조를 바꿀 수 없는 이들이 한정된 자원 안에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던 순간들을 우리는 아무런 이해 없이 너무 쉽게 단정하고, 분석했던 것은 아닐까?
 
현장을 버리면, 현장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운동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어요. 사실 부산도 마찬가지거든요. 무슨 탈핵 집회를 해도 정작 마을에 사는 주민이 이제는 안 온단 말이에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해야 했는데,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요. 마을주민들은 "함께 싸우던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날 때 그들에게 굉장히 상처를 받았다고 해요. 같이 싸웠는데 갑자기 활동가들이 떠나니까." 주민들은 그걸 겪으면서 이젠 활동가들을 외부 사람 취급하는 거죠. 못 믿겠다는 거고. 그러면서 그들도 싸움이 아니라 최대한 '유용성'을 얻어낸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죠. 싸우기도 해봤고, 반핵도 외쳐봤지만, 함께 싸웠던 활동가들은 떠나고, 자기들만 남은 상황에서. 주민들에겐 삶과 운동이 분리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활동가들이나 연구자들은 잠깐 와서 목소리 외치고 주먹 몇 번 하늘로 뻗다가 집에 가면 그만이지만. 여기에 사는 주민들은 그게 아니니까. 내가 가도 주민들은 인상을 팍 써요. 계속해서 노력하고 찍은 사진을 드리기도 해요. 근데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안 하지. 주민들은 우리를 못 믿게 된 거죠. 참 안타깝고 미안하죠.     

현재의 시선으로만 주민들을 평가하면 핵발전소를 지지하고 찬성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30~40년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주민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 함께 싸우던 활동가들에게 상처도 받고, 정부와 한수원에 대항해 싸우다 지치기도 하며 결국엔 모든 걸 다 빨아들이는 거대한 힘에 싸울 기력도 의지도 빼앗겨 원전 지원금을 바라거나 핵발전소를 추가 유치해서 도망을 택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지 못한 그들의 역사인 것이다. 

장영식은 한 걸음 나아가 핵발전소로부터 혜택을 받는 지역 주민은 소수로, 지역의 토호 세력이나 건설업자이고 대부분 주민은 아무런 혜택이나 이익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리 갔을 때 커피를 마셨는데 해녀회관을 수리해서 마을카페로 만들었어요. 근데 그것도 그 지역의 토호세력이나 건설업자들이 사업을 따내서 돈을 버는 거죠. 발전소에서 지원금이 나와도 이들 소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기자회견이든, 뭐든 현장에서 해야 한다고 계속 말하죠. 왜 누구도 듣지도 않는 시청 앞에서 하냐는 거지. 맨날 똑같은 기자회견, 아무런 변화 없는 기자회견, 기자 몇 명 오지도 않고, 보도도 안 되는 기자회견을 왜 현장이 아닌 시청에서 하냐는 거지. 현장에서 기자회견 하면 싸움이 나겠지. 그걸 이해하는 것에서 진짜 운동과 활동이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왜 저 주민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탈핵을 외치는 우리를 싫어하나, 그것도 들어보고. 우리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보고. 서울에서 오는 활동가들도 부산 중심지에서만 집회하거든요. 그럼 현장을 몰라. 핵발전소가 있는 마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지역주민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반대할까를 힘들더라도 겪어봐야 하는데, 그걸 안 하니까 활동가들의 활동조차 현장과 괴리가 생기는 거지. 그런 거에 대한 나의 분노와 안타까움이 있는 거예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탈핵 잇다 브런치(https://brunch.co.kr/@wcvictory/7#comments)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장영식, #탈핵잇다, #골매마을, #고리핵발전소, #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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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수료생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관련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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