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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그의 이름 앞에 서면 여전히 경건해진다. 그의 올곧은 처신을 살펴보면 숙연해진다. 그리고 그의 분방한 삶을 알아보면 유쾌해진다.

세속의 명리와 출세의 욕망을 헌신짝 여기 듯 하며 도학자로서 부패한 정치를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 선비의 책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인물, 과거에 합격하고도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면서 유능한 제자들을 키웠던 처사(處士).

남명은 1501년 외가인 경남 합천군 삼가현 토골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생원을 지내고 아버지 조언형은 등과하여 승문원 판교를 역임했다. 어머니는 인천 이씨다. 이조좌랑이었던 숙부가 을묘사화의 여파로 목숨을 잃고, 아버지도 좌천되는 시련을 지켜보면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할 뿐 관직에 나가려하지 않았다.

어려서 서울로 올라온 남명은 방안에 유가의 원조격인 주자(朱子)와 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을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며 유학에 진력했다. 16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농사일도 하였다.

30살이 되던 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인 김해의 단동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남명은 생활이 곤궁했으나 생계에 긍긍하지는 않았다. 주의에서 과거에 응시하고 출세하라는 권유도 못 들은 채 했다.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남명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갖고 성수침·성수종 형제를 비롯 재사들과 사귀었다. 하지만 서울에 생활기반이 없어서 출생지로 낙향을 서둘렀다. 이후 평생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학문연구와 제자 교육, 산천유람으로 자유롭고 호쾌한 생을 살았다.

조식은 일찍 남명이라 자호하였다. 장자(莊子)의 첫장에 나온다. "북녘의 아득한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 이름은 곤(鯤)이라고 한다.(…) 곤은 어느날 갑자기 새로 변신하는데,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붕이 한 번 떨쳐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펼친 날개는 창공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일어나면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로 날아가려고 한다."(<장자> <소요우>편)

남명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요망한 책'이라고 멀리했던 <장자>에서 호를 취한 것부터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세속의 기준이나 세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식의 호는 이상향인 남녘 바다를 날아가는 '대붕'을 뜻하여, 이것은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다."(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남명'을 호로 취할만큼 조식의 포부와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다. <덕산계정주(德山溪亭柱 )>라는 그의 시다.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나지 않는다네
그러나 어찌 두류산만이야 하리
산은 천둥벼락이 쳐도 끄덕도 않는 것을."


남명의 도량이 이 정도였다. 천석들이 종을 칠 수 있는 큰 '북채'가 되고자 하였다. 1539년 조정에서 헌릉참봉에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했다. 1549년에는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조정은 1555년 (명종10)에 그의 높은 학덕을 사서 단성 현감을 제수했다. 이를 받을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왕 명종을 수렴청정하면서 온갖 전횡을 일삼는 부패한 왕대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직소를 올렸다. 이른바 <을묘상소>이다. 봉건군주 시대에 임금과 왕대비를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한 상소는 흔치 않았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하늘의 뜻도 떠나갔으며,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컨대,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를 지경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내직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당파와 권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고,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臣)이 낮에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하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명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조정에서 크고 높은 벼슬자리를 내렸으나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벼슬을 거부한 채 은일로 학문하는 그의 명성은 전국으로 널리 알려졌다. 40대에 김해의 신어산(神魚山) 자락에 은거했다가 이어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의 덕산 사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만년까지 살았다. '신천재'는 <주역>의 한 대목인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남이 날로 새롭다"라는 의미의 서실이었다.

남명은 문인이면서 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銘)을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하는 것은 경이고, 밖으로 의를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경(敬)과 의(義)는 그의 선비정신과 실천철학의 중심가치였다. 이후 '경의' 두 글자는 "하늘의 달과 해처럼 변함없는 진리이니 힘써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이 배출된 것은 남명의 이와 같은 실천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누구든지 '좌우명'은 자신의 신념을 집약하는 것이지만 남명의 경우는 남달랐다.

"언행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 막고 정성 보존해야지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게 해야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김해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동상.
 김해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 동상.
ⓒ 김해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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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은 학문을 거듭하고 청절을 지키면서 음풍농월이나 일삼는 한가한 선비는 아니었다. 나랏일에 관심이 많았고 조정의 부패에 대해서는 매섭게 질타했다.

남명의 남명다움은 풍류적인 분방함과 처신에 있었다. 기존가치관에서 벗어난 개혁의지나 유학에 바탕하면서 노장철학으로 무장한 안빈낙도의 생활은 당대 선비들의 전범이 되었다. 그는 관직이 공명을 얻는 선비들의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던 시대에 "공명 보기를 하늘 가운데 한 점의 조각구름처럼" 여겼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남명의 명예는 나날이 더해지고, 조정에서 그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출사를 거부하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남명은 심중에 무수한 시상을 간직한 시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보였던 그는 시대와 불화하면서 세태와 자연에 관해 많은 시를 남겼다. 높은 벼슬아치들을 '큰 쥐'에 비하여 쓴 <석서(碩鼠)>의 뒷 부분이다.

"큰 쥐 큰 쥐야
항상 찍찍거리는구나
아첨떨며 교묘히 남을 헤쳐
남의 마음 슬프게 하니
어떻게 불인한 고양이 얻어
한 번 잡아 씨를 말릴까
큰 쥐 한 번 새끼를 치면
쥐새끼들 온 집안에 가득
난 맘씨 좋은 영주 모씨 아니니
저 장탕의 옥에 부치리
너의 깊은 소굴 메워
종적을 멸하게 하리."


남명이 지리산 밑에 둥지를 틀고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즈음 인근에는 퇴계 이황이 역시 출사를 중단하고 낙향하여 고고한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다. 1501년의 동년생이고 생활권이 비슷한 데다 서로간에 소식을 익히 듣고 있었으나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몇 차례 인편으로 서찰만 주고 받았을 뿐이다. 세간에서는 퇴계를 경상우도, 남명을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큰 학자로 꼽았다.

퇴계의 사상이 관념적이라면 남명의 철학은 보다 실천적이었다. 하여 임진왜란 당시 남명 문하에서 다수의 의병장이 배출되고, 강직한 제자들이 많아 조정의 대신들에 대한 잇따른 상소 등으로 크게 탄압을 받게 되었다.

남명은 숨지기 전 자신이 수양하는 데 쓰던 방울은 제자 김우옹에게, 칼은 역시 제자 정인홍에게 주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이 그를 정적으로 몰아 처형하였다.

선조 4년인 1572년 남명의 나이 72살에 이르러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제자들이 "혹시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땅히 어떤 칭호를 써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남명은 망설이지 않고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옳겠다"라고 답했다.

남명은 '처사', 곧 벼슬을 멀리한 재야지식인이다. 퇴계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 남명에게 벼슬을 추천하자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을 이유로 댔다. 누구 못지 않는 경륜과 식견을 갖고 총명했던 그였다.

'처사'로서 평생을 당당하게 살아온 남명은 1572년 2월 8일 제자들에게 '경(敬)·의(義)'의 중요함을 거듭 상기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조가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했으나 고인은 결코 사후의 큰 감투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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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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