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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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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의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 1880~1960)은 만주를 무대로 해방될 때까지 민족운동에 목숨을 바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경남 밀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밀양읍 신창학교와 대구 협상중학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민족운동에 나섰다. 안희재·이원식·김동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 활동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보다 효과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대종교를 창단한 나철을 찾아갔다. 이것은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대종교와 민족운동에 바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뒷날 일제로부터 무기형을 선고받은 <기소장>의 관련 부분이다.

"(1910년) 8월에 일한합병의 실현을 보자, 이것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이라고 독단하고는 망국 조선의 회복을 원망(願望)함에 따라 독립회복에 협력할 동지를 획득하려고 하던 중, 마침 동년 음 12월 말경에 경성부 간동(諫洞)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을 방문하게 되어, 대종교의 교리에 관한 해설을 받고 동교의 전기 목적을 지실(知悉)하면서 동 단체의 목적 달성에 협력하기로 결의하고, 즉시 이에 가입하여 1911년 음 정월 29일에 동교의 참교(參敎)가 되고, 또 시교사(施敎師)에 임명되어 나철로부터 만주에 대한 포교의 의뢰를 받고, 동년 음 2월에 도만(渡滿)하여 현 안동성 환인현에 이르러 포교한 다음 대정 3년 음정월에 지교(知敎)로, 동 5년 음 4월에 상교(尙敎)로 승진하고, 동년 8월 이후 5개년간 통화성 일대에 긍(亘)하여 순회 시교한 결과, 교도 약 7천 명을 획득하는 등, 전혀 교세의 확대 강화에 활동 종사하여 왔고," 

대단히 서글픈 일이지만,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과정에서 일제의 재판 기록을 인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달리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의 '기소장'은 이어진다.

"또 대정 8년 3월 1일에 조선에서 독립만세사건이 발발하자 만주에 있는 조선민족도 이에 호응하여 각지에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이르렀으므로, 피고인은 동년 7월 경에 현 통화성 무송현을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대종교도를 규합하고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무장단체인 흥업단을 조직하여, 본단 간부로서 동 11년 정월경까지 항일독립운동에 정신하는 등,

극고도의 반일민족사상을 포회하여 항일실천활동에 종사하여 왔으며, 전기한 바와 같이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은 대정 12년 음 11월 18일에 사망하자, 그 유명에 의하여 동 13년 음 정월 22일에 대종교총본사의 소재지인 현 동만총성 영안현에서 제3세 교주에 취임하였고"(후략)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구심점을 잃은 민족에게 대종교가 국조인 단군을 모시는 민족고유의 종교라는 점과, 나락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대종교의 세력 확장이 시급하다는 판단으로 입교하였고, 마침내 제3세 교주라는 막중한 위치에 올랐다. 1923년 제2세 교주 김교헌의 유언으로 1924년 초에 대종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앞길은 가시밭이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와 만주 봉천성장이 만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규제하는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고, 이듬해에는 만주 군벌에 의해 대종교의 포교 금지령이 내렸다. 국내에서 포교 금지와 교도탄압에서 벗어나고자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는데 이곳에서도 금령이 내렸다. 일제가 대종교를 그만큼 두려워했다는 반증이다. 

윤세복은 1928년 총본사를 러·만 접경지인 밀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은밀한 방법으로 포교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대종교 교리인 <삼일신고>를 비롯 단군 사적을 기록한 <신단실기>, 대종교의 의식을 기재한 <종례초략>, 대종교에 대한 일반 해설서 <종문지남> 등을 간행하여 비밀루트를 통해 국내와 해외 교도들에게 보냈다. 

일제는 1942년 태평양전쟁 도발을 전후하여 국내외의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에 나섰다. 윤세복을 비롯 대종교 간부 20여 명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안희재와 간부 10명은 혹독한 고문으로 치사당하고 윤세복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날조한 사건에 연루시킨 것이다. 

2년 여동안 만주의 일제 감옥에 갇혔던 그는 8.15해방을 맞아 석방되고 1946년 환국하였다. 1948년 대종교 총본사를 재건하고 교회강습회를 개최하는 한편 <삼일신고>, <신사기>, <회삼경> 등의 종경(倧經)을 국역, 주해했으며, 1949년 <한검 바른길 첫걸음> 등을 잇따라 간행하여 대종교의 재건을 준비하였다. 

윤세복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54년 11월 15일부터 1955년 6월까지 7개월 여 동안 남한 각 지역을 순회하여 도본사 3곳과 지사 5곳, 사교당 33곳을 부활 또는 신설하였다. 이렇듯 지방 순회와 종리(倧理)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후 1955년 총전교직을 정관(鄭寬)에게 넘기었다. 그 후 그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1957년에는 종사 편집주간을 직접 맡고 박창석·이원대 외 수십 명의 도움을 얻어 전후 3년 간에 걸쳐 <종사취재고> 전15권을 찬술 하였다. 

1958년에 전교회의 결과에 따라 총전교를 재임하였으며, 1960년에 대종교연합회의 결의로 '종사가희형호(倧師加喜兄號)'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2월 13일에 사망하고 말았다.(박영석, <윤세복>)

태그:#겨레의인물100선, #윤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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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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