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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 사진 제공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 사진 제공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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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梁起鐸, 1871~1938)은 평양에서 아버지 시영(時英)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의종(宜鍾), 아호는 우강(雩岡) 또는 운강(雲岡)이며 필명은 우강(于岡)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살이 되던 해 상경하여 평북 위원 출신으로 유림의 명망가 나현태를 만나 심오한 학문과 높은 인격에 감화를 받고 식견을 넓혔다. 또한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여 일찍이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1895년 미국인 게일(한국명 奇一)이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 주관의 만민공동회에서 부총무장으로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출옥 후 게일의 소개로 1900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힌 후 33살이 되던 해에 귀국하였다. 1902년 이상재·민영환·이준·이상설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여 혁신운동을 추진하다가 피체되었으며 출옥 후에는 한 때 한성전기의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1904년 3월 황실의 외교 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의 영어통역관을 지냈으며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에 참여하고 그 후속단체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해 7월 영국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과 제휴하여 국한문혼용체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한국인의 민족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외세의 침략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문발행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내탕금과 이용익·민영환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한 것이다.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 역할을 하였다. 제작진은 주필 박은식을 비롯하여 신채호·최익·옥관빈·변일·장도빈 등이고 영업진은 임치정·안태국 등이었다.

신문은 이듬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라는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영국인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는데 사옥 밖에는 일제 관헌의 사옥 출입을 금하는 방(榜)- '일인불가입(日人不可入)'을 내붙였다.

신문은 1907년 1월 16일자로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한 친서가 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 등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크게 보도하는 한편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전재했으며 영문판에는 영어로 이를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사실을 호외로 보도하였다. 당시 다른 신문들은 일제의 신문지법(新聞之法)에 의한 제약으로 보도하지 못했다. 또한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으로는 이 신문이 유일했다. 이 신문은 통감부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 지원금 총합소'를 개설, 보상금 모금에 앞장섰다. 

일제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위해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양기택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사장인 베델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2개월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5월 23일자로 이 신문은 한문을 해독치 못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판을 발행하였는데 1908년 현재의 발행부수는 한글, 국한문, 영문판을 합하여 134,000부였으며 지사(支社)는 1907년 11월 현재 모두 23곳이다. 

그는 또한 대한자강회, 광무사(光武社), 서우학회, 서북학회, 국문연구회 등에 참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 창설위원은 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이다. 신민회의 총감독은 그가 맡았다. 

1909년 봄 신민회는 국외에서 독립군 창설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양기탁은 이듬해 8월 직접 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지역을 답사했다. 

일제는 안명근 군자금모집사건, 안악사건 등을 기화로 해외독립군기지 건설을 탄압하기 위해 '보안법위반사건'을 조작하여 그를 포함, 16명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 뒤이어 '데라우치 총독암살음모사건'(일명 '105인사건')을 조작,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항소심에서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2월 석방된 후 다시 평남 강남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하다가 천진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1918년 2월 고국으로 압송, 전남 거금도에 2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12월 유배에서 풀려나고 이듬해 8월 미국 의원단의 동양3국 순방을 기회로 '미국의원시찰단 환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서울역에 내릴 때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친이 충격으로 작고하자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일시 방면된 기회를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1923년 10월 편강렬·남정 등과 의성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 봉천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을 습격하는 등 장춘선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앞서 1922년 오동진·김동삼 등과 통의부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11월에는 지청천·김동삼 등과 통의부,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군정서 등 남북 만주에 산재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통합, 정의부를 창립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기관을 공격케 하였다. 

1928년 그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를 통합하여 1929년 5월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1930년에는 남경으로 가서 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김규식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양기탁은 1930년 가을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사임으로 후임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절하였다. 1934년 1월 중국 진강에서 실시한 임시정부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된 후 제10회 의정원에서 다시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1935년 10월까지 임정의 활성화와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국무령 시절 독립운동 관련 정당, 단체의 대통합을 목표로 삼고 활동하였다. 1934년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의 실현강령을 채택하고 1935년 7월 마침내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한 민족단일당으로 '민족혁명당'의 결성을 이끌었다. 

그러나 5당합당 이후 당내 분열이 발생하자 1937년 8월 지청천·최동오·유동열 등과 조선혁명당을 새로 결성,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무렵 중일전쟁(1937. 7. 7)의 발발로 대일결전이 임박하자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3당과 대한인독립당 등 재미(在美) 6개 독립운동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과 특히 5당합당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중국 강소성 담양현 길당암에서 요양 중 1938년 4월 19일 68살을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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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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