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나의 더러운 욕망을 저주한다"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19] '친일' 사죄, 처음이 아니다

등록 2011.10.21 16:14수정 2011.10.2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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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친일전력자의 한 후손이 조상을 대신해 사죄의 글을 발표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윤석윤(경기 군포 거주)씨는 지난달 초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비공개로 "저는 친일파의 손자입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드립니다"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당사자도 아닌 후손이 선대의 친일 죄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한 사례는 파인 김동환의 아들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조부가 사망한 후에 태어난 윤씨는 부모님을 통해 조부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그 후 군수를 지냈다는 등 단편적인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으나 그 외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습니다. 평소 조부에 대해 늘 궁금해 하던 윤씨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는 얘길 듣고 혹시 하는 마음에 도서관으로 달려가 확인해 보았는데, 그 속에는 조부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로써 윤씨는 비로소 자신의 뿌리인 조부를 찾게 된 것입니다.

친일파 후손의 사죄... "국민과 민족 앞에 사죄"

윤씨의 조부는 일제 강점기 초기에 군수를 지낸 윤수병(尹壽炳, 1876~1953)이라는 인물입니다. 윤수병은 1895년 구한국 정부의 제1회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다른 양반 집안 자제들과 함께 일본 동경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유학한 뒤 귀국하여 1900년에 농상공부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후에는 충청·전라도에서 군수로 근무하다가 1926년 50세의 나이로 퇴직하였고,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77세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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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구한국 정부에서 일본에 파견한 제1회 관비유학생들. 이들 가운데 적잖은 친일파가 생겨났다 ⓒ 자료사진


윤씨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퇴직 후 유랑생활을 하였으며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은 산파 자격증을 갖고 있던 조모의 몫이었다고 합니다. 윤씨는 이번에 조부의 삶에 대해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모든 궁금증이 다 해소된 건 아닙니다.

윤씨는 조부가 어떤 생각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 후 민족과 국가의 운명,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또 을사늑약 체결 및 한일병탄 때 현직 관료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등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조부는 일기나 비망록 같은 걸 남기지 않아 그 의중은 알 길이 없다고 합니다. 

윤씨는 "해방 후에 반민특위를 통해서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않은 것이 (우리)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평소 윤씨는 친일파들이 공직에 근무하면서 과거 친일행위에 대해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뻔뻔스럽다고 여겨왔습니다. 특히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은 치부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사회에서 성공한 반면,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분개해 왔는데, 이번에 그는 그 자신이 바로 친일파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조부를 대신해 민족과 역사 앞에 사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통해서나마 할아버지의 외적인 삶의 궤적을 찾게 되니 할아버지가 친일관료였다는 안타까운 사실보다 잃어버린 할아버지를 찾은 기쁨이 더 크다. 오늘 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이 발걸음은 작지만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바로세우기를 하는데 벽돌 한 장을 올리는 심정으로 내 집안의 역사와 진실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고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시느라 수고하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국민과 역사 앞에 그리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혹은 고생하신 많은 분들과 그들의 자녀분들에게 친일파셨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한 친일파의 손자가 가슴깊이 사죄드린다!"

그렇다면 친일파 가운데 자신의 친일 죄과를 반성하고 참회한 사람은 없었을까? 그건 아닙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몇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운 친일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글이나 말을 통해 사죄한 바 있습니다.

우선 반민특위 재판 과정에서 방청객들이 만장한 가운데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최린(崔麟)을 들 수 있습니다. 최린은 변절 이유를 묻는 서순영 재판장에게 "기미년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고 말한 뒤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라"며 눈물로 참회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조덕송 기자에 따르면, 최린의 진솔한 참회를 듣고 법정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린은 방청객이나 재판부에게 동정을 샀으며, 그로 인해 기소는 되었으나 20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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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호 자서전 <한 삶의 고백> 표지 ⓒ 현석호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통해 친일을 사죄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2공화국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玄錫虎, 1998년 작고)는 1986년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1907년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성제대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그는 전라남도 경부를 거쳐 1936년 화순 군수가 되었으며, 이어 황해도 산업과장, 총독부 사무관을 거쳐 충청남도 광공부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는 자서전 첫머리의 '회고와 참회'에서 아래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관리로서의 거취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나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없지만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이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투쟁에서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공로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관리생활 동안에 피부로 느꼈던 차별대우와 모멸감에서 해방된 기쁨과 감격은 남 못지않게 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의적 죄책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대위)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신현준(申鉉俊, 2007년 작고) 초대 해병대사령관도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89년 <노해병의 회고록>을 펴냈는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부분이랄 수 있는 만주군 시절을 소상히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일본군(만주군)에 복무했던 인사들 가운데 회고록을 펴낸 자가 적지 않으나 그처럼 당시의 일을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 90년대 중반 인터뷰 차 경기도 평택에 있던 그의 자택을 방문한 필자에게도 당시 상황을 소상히 얘기해줬고, 또 그때의 일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일제 때 군수가 뭘 하는지 알고 맡았다면 친일파"

일각에서 "상습적 양심선언가"라는 핀잔까지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지난날을 고백한 이항녕(李恒寧, 2008년 작고) 박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경성제대 재학시절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그는 해방 때까지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냈습니다. 해방 후 근신 차원에서 경남 양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그는 이후 동아대 교수,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등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때 고등관인 군수가 뭘 하는 자리인 줄 알고 맡았다면 모두 친일파"라며 자신도 당연히 친일파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1960년대 초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하였으며, 1991년에는 자신이 잠시 군수로 근무했던 하동군에 가서 군민들에게 일제말기 공출 강요 등에 대해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1980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는데요, 이는 참회문의 대표글로 삼을 만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매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오래 안일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욕망은 하필 오늘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가 만고불멸의 철칙으로 알고 지켜온 나의 확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 확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한일합방 때 절개를 지킨 애국자의 자손들이 곤궁하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중략) 나는 일제시대에 그들에게 아부한 사람들은 잘 살았고, 그 자손들도 좋은 교육을 받아 지금까지도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중략) 나는 일제 때 그들에게 붙어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것을 해방 직후에는 부끄럽게 생각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가서 나의 일제 행각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시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끝으로 파인 김동환(金東煥, 6.25 때 납북) 얘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초창기에는 '국경의 밤' 등 민족적 면모가 강한 시를 썼던 파인은 일제말기 친일로 변절해 삶에 오명을 남겼습니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자수(2.28)했으나 최종 재판에서 '공민권정지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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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친일을 대신 사죄한 김영식 씨 ⓒ 오마이뉴스


지난 200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3남 영식(英植, 2009년 작고)은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등 그의 부친과 관련한 방대한 자료집을 여럿 펴냈습니다. 영식은 그 가운데 94년에 펴낸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서문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영식은 부친을 대신해 부친의 친일행적을 사죄한 것입니다. 당사자도 입 다물고 사는 세상에 이런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자 또 귀감이 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윤석윤 씨의 조부 대신 사죄는 친일파 후손의 사죄로는 두 번째 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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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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