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정근
한양에 빈소가 마련되자 문상객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천성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어 실수가 적었다. 태종과 함께 한 16년 동안 많은 사람을 챙겼고 요직에 심었다.
태종은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로 있던 하륜의 사위 이승간에게 한양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군인은 장졸을 불문하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이 군법이다.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게 하고 군인 사위를 불러올리는 것은 모두 파격이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하륜의 빈소에 제사하고 임금이 친히 사제(賜祭)하였다.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빈소를 찾은 태종이 말을 꺼냈다.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오."
"국장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가인(家人)을 시켜 장사하라. 고 하륜이 유언했다 합니다."
지신사 조말생이 하륜 가족의 얘기를 전했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선각자, 영원히 잠들다"대신(大臣)의 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인데 하륜의 공덕이 국장으로 손색이 없지를 않소?"
태종은 아쉬웠지만 하륜의 유언과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국장은 생략했다. 그 대신 국장도감(國葬都監)에 명하여 구의(柩衣), 단자(段子), 견자(絹子) 각각 1필, 상복(喪服)에 쓰는 정포(正布)17필, 혜피(鞋皮) 2장을 하륜의 집에 보냈으나 부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륜의 장례는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선영이 있는 진주 미천면에 묻혔다.
하륜이 주창한 저화(楮貨) 사용과 순제 운하를 정도전과 같은 추진력으로 강행했다면 조선의 경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6백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운하가 경제의 효자다. 애물단지다. 갑론을박 현안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아득히 먼 6백 년 전에 오늘날의 지폐에 해당하는 저화 사용을 시행했고 삼남지방과 연결하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으니 선각자임에는 틀림없다.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국가 정체성과 경제육전(經濟六典) 같은 뼈대를 중시한 반면 하륜은 실질적인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릇의 크기는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깔아놓은 초석이 있었기에 조선 5백년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