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밖에 한 게 없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

자긍심 사라진 채 생활고에 시달리는 운동권 후배들을 보며

등록 2007.09.04 10:38수정 2007.09.0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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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운동권 출신들의 생활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80년대 민주화운동 참여자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발표했다고 한다. 월 평균수입을 묻는 질문에서 응답자의 34.6%가 100만 원~200만 원이라고 답했고 100만 원 이하도 19.4%나 되었다.

결국 386 운동권 반 이상이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라는 계산인데 그 나이에 그 정도 수입이라면 생활정도가 어떤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지 않은가. 자가 주택 소유자도 49.9%였고 응답자의 66% 정도가 자신의 생활정도를 '중하층'으로 답했다니 고단한 운동권 출신들의 생활고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정치권이나 제도권으로 진입해 넉넉한 생활을 하는 부류나 전문직 또는 자영업으로 성공한 386 운동권은 한 줌밖에 안 되는 소수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청춘을 불살랐던 사람들. 빛도 이름도 없는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투쟁의 대가는 팍팍한 생활과 불안정한 미래가 전부인 셈이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경제적 형편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68.3%였다.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던 그 사람들에게 자긍심 대신 허망함과 상대적 박탈감만 남은 현실. 민주화 제단에 바쳐진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땀과 눈물을 우리는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지금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자긍심도 상실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노태우 정부 시절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시위 장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지금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자긍심도 상실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노태우 정부 시절 노동운동탄압을 규탄하는 시위 장면. 박용수선생 사진첩에서



그 뉴스를 보니 옛날 일이 떠오른다. 우리가 활동했던 70~80년대는 운동권 출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운동단체에 상근하는 간부들도 아내가 직업이 있는 사람은 활동비도 없고, 활동비를 준다 해도 오만 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자니 모두가 사는 게 형편없어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빈민층'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가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이라 하루하루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견딘 세월이 그 세월이었다. 힘든 일에 공동 대응하는 것도 남달랐다. 누가 아프다 하면 십시일반으로 재빨리 모금을 해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고 부모님 칠순이나 어린 자식들 돌잔치까지 모두가 가족이 되어 축하행사를 열어 주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인생 궤도 수정한 왕년의 '동지'들

어려움도 외로움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그 때.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가족 모두 불평  불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통용되던 시절도 그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군부독재가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비록 민자당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등장은 군부독재와 민주화 운동권이라는 정면 대결을 한순간에 헝클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여태껏 한 점 헛갈릴 것 없이 분명하게 구분되던 적군과 아군의 투쟁전선이 모호해진 것도 힘 빠지게 했다.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맹렬한 투쟁 방식은 끝났다." "세상이 변했다."

운동권 출신들의 행보가 번잡해지기 시작한 때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고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아주 노골화 됐다. 정치권이나 학계, 아니면 고시 도전이나 자영업 등 분야도 다양했다.

발 빠르게 인생 궤도 수정을 하는 왕년의 '동지'들을 바라보며 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부부.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친구들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황당함과 두려움 때문에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능력도 없고, 전문성도 없고 더구나 기댈 언덕도 없으니 먹고 살기 위해 구멍가게 하나 해보려 해도 종잣돈 구하기가 난망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재야운동가' 아닌 다른 업을 찾기 힘들었던 내 남편.

우리 집을 찾아 와 남편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거나하게 취해 시국담을 논하던 남편 친구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야, 70년대 운동권은 '구 빨찌'고 80년대 이후 운동권은 '신 빨찌'란다. 40~50살 먹도록 한 게 민주화운동 밖에 없는 우리들이 나이 들어 무엇을 할 수 있겠냐? 이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해 고시에 도전할 수도 없고, 전문성이 없으니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점방 하나 차릴 돈이 없으니 장사도 못 하고…."

변할 수 있는 신 빨찌와 적응 불능 구 빨찌

그 친구 말에 따르면 변하는 세상에 맞춰 재빠르게 대응하는 80년대 운동권은 전향이 가능한 신 빨찌(빨치산)고 우리 같은 '늙다리'는 변화를 하고 싶어도 적응이 불가능한 구 빨찌라는 데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그냥 가슴만 아팠다.

다시 돌아와 80~90년대 운동권 후배들의 외로운 처지를 확인하자니 내 자화상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나라 민주화의 기틀을 이루는 데 작은 초석이 되었다는 자부심, 내 열정과 청춘과 헌신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자긍심이 있다면 그래서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의 생활고가 어찌 못 견딜 형벌이 되겠는가.

참여정부 들어서 정계나 국가 기관으로 진출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도권에 진출한 운동권 출신들은 국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덕분에 운동권 전체가 싸잡아 희화되고 무능한 인간 집단으로 취급받게까지 되었다.

사회의 양극화 못잖게 갈수록 '민주화 운동 참여자'들의 심정적 양극화도 심화되는 것 같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떨어진 열매조차 구경 못한 수많은 참여자들. 그들의 허탈감과 막막함을 피부로 느끼다보니 그들이 벌써 그 옛날 우리가 처했던 '구 빨찌' 신세가 됐구나 하는 자괴감에 헛웃음이 나온다.
#민주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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