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저두 이런 색깔 옷은 처음 입어보는 거예요. 형수님두 아시잖아요. 내가 그동안 입었던 옷이 거의 우중충한 색이었다는 거."
남편 후배부부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놀러왔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다섯식구가 들어오니 좁은 거실이 꽉찬다. 나는 후배의 진한 꽃분홍색 옷이 볼수록 신기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십여년을 알고 지내는 동안 그 후배가 밝고 화려한 색깔옷을 입었다는 기억이 없다.
"이런 색깔옷을 입을 줄은 나두 몰랐어요. 근데 밝은 옷을 입으니까 마음도 달라지더라구요. 생활이 밝아지는 것 같구. 참, 형두 한 번 입어볼래요? 크기만 알면 내가 사서 보내줄께!"
남편한테 후배가 꽃분홍 티셔츠를 사서 보낸다고 했다. 남편은 '됐어'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왜, 당신도 이번 기회에 한 번 입어봐. 마음이 달라진다잖아. 생활도 밝아지고' 진달래꽃 피듯 꽃분홍빛으로 생활이 활짝 핀다면 그거야 못입을 것도 없었다. '당신이 안 입으면 내가 입을게' 옆에서 내가 한 술 더 떴다.
한때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오가기도 했는데, 작년쯤 그들 부부가 공주쪽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3학년인 딸, 그리고 올해 여섯 살 난 딸애를 막내로 세 남매를 두었다. 두 아이들은 현재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고, 아이들 엄마는 그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일 년 가까이 못 보는 새 아이들은 부쩍 자랐다. 세 아이가 나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본 우리 부부는 그저 튼튼하고 밝게 자라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각자 책 한권씩을 빼들고 저마다 편한 자세로 그림책이나 동화를 보았다. 한켠에선 어른들이 차를 마시며 아이들 얘기며, 세상사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언니, 재영아빠가 왜 저 옷을 입었는지 알아?"
"왜, 옷에 무슨 사연이 있는거야?"
"재영아빠 담배 피웠잖아. 요즘 담배 안좋은 거 아이들도 다 알거든. 명희(둘째)가 '아빠금연'이라고 쓴 글을 냉장고에 붙여놨었어. 애한테 자극을 받았겠지. 명희한테 '아빠가 이젠 담배 안 피울께'라고 약속을 하더라구. 처음 며칠은 담배를 안 피우대. 정말 담배를 끊었나싶었지. 근데, 나흘쯤 지나서 담배를 피우는 거야. 명희가 그걸 보고 한숨을 푹 쉬면서 중얼거리는 말을 제 아빠가 들었어. 그 다음에 저 옷을 사더라구. 딴에는 결단을 내리게 하는 뭔가가 필요했나봐. 그게 바로 저 옷이야, 호호…."
나는 재영아빠의 옷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여겨 보니 목 둘레쪽이 연둣빛이다. 이파리가 꽃을 살짝 받치고 있는 것 같다. 딸아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민한 '결과물'이 저렇듯 화사한 티셔츠라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한편, 담배연기마다 날려보냈을 사십대 가장의 무거운 짐이 헤아려졌다.
셋째를 낳고 나서 언젠가 재영아빠와 농담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 둘이 있을 때와 셋은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며 제대로 교육시키고 키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고 했던 말에 나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궁금했다. 명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제 아빠가 꽃분홍빛 옷을 사 입으면서까지 금연결심을 굳히게 했을까? 후배는 정말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같다. 올해 아홉 살인 명희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담배 피우는 것도 속상한데… 아빠가 이젠 거짓말까지!"
2007.09.12 21:08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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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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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는 것도 속상한데 거짓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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