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동요 호박' 대박 나게 해줘유"

드라마가 있는 호박에 대한 단상

등록 2007.09.18 10:48수정 2007.09.18 11:5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동요 호박

서동요 호박 ⓒ 오창경


시골 마을의 가을은 벼가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과, 시골집 마당에 붉은 고추가 가을 햇볕에 말라가고 그 한쪽 토담에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붉은 호박이 걸려 있는 풍경으로 온다. 하지만 올 가을은 질기게 내린 비 때문에 그런 평범한 가을 풍경을 보기 힘들 것 같다.


농부들은 누렇게 물들어 가는 논둑에 서서 영글어 가는 벼이삭을 한번,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한숨을 짓고 있다. 처서가 지나서 내린 비로 수확을 앞둔 벼들이 엎어져 논에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도 볼썽사납고 가슴이 아픈데 수확을 앞둔 마당에 태풍까지 몰고 오는 비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우리 '서동요 호박' 좀 인터넷에 띄워서 대박 나게 해줘유."

인터넷에 뜨기만 하면 다 대박 나는 줄 알고 있는 시골 어르신 한 분이 우리 집에 찾아와  호박 한 덩어리를 촌지(?)로 내려놓고는 애교 섞인 으름장을 놓고 가셨다.

충남 부여군의 또 하나의 명물이 된 충화면의 드라마 세트장에는 과연 봄에 심은 호박이 결실을 맺어 관광객들에게 심심치 않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강년(59)씨를 비롯한 세트장 관리인들은 울타리마다 호박을 심어 정성들여 가꿔왔다. 그 결과 맷돌처럼 단단하고 잘 익은 호박들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작은 것들은 말만 잘하면 덤으로도 주고 거저도 줄거유. 어차피 큰 것들은 즙내서 보약으로 먹으니께 공짜로 먹겠다는 사람들은 없었유."


a  드라마 세트장 싸리 울타리의 호박들 사이에 박 한 덩어리는 덤이다.

드라마 세트장 싸리 울타리의 호박들 사이에 박 한 덩어리는 덤이다. ⓒ 오창경


자칭 '서동요 호박'이라고 브랜드까지 지었다는 이강년씨는 드라마가 끝난 세트장이 허전하지 않도록 초가집 지붕에는 박을 올리고 울타리 밑에는 호박을 심게 됐다고 한다.

애호박은 여름내 된장찌개로 비오는 날 부침개로 식탁의 단골 메뉴로 오르다가 붉게 익는 가을에는 강장식으로 웰빙 음식의 재료로 또 다시 인기를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호박은 잎에서 호박꽃을 비롯해 잘 여문 호박씨까지 못 먹는 부분이 없는, 정말 알뜰한 채소이다. 거기다 기르기도 쉬워서 도심의 변두리 자투리땅에도 반드시 심어져 있기도 하고 어느 한적한 주택가 마당에 심어서 옥상으로 올린 호박 넝쿨을 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a  호박이 넝쿨째

호박이 넝쿨째 ⓒ 오창경

예부터 늙어서 좋은 것은 호박뿐이라는 말처럼 호박은 붓기를 빼고 다리 힘을 단단하게 하는 약성이 있다고 해서 보약을 준비하는 가을이면 빠지지 않는 약재로 쓰인다. 호박즙은 산후 회복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아이를 낳은 산모들의 필수 음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비타민과 칼륨, 섬유질이 풍부해 부침개와 떡 케이크, 호박죽 등의 웰빙 요리에 응용해도 좋은 가을의 대표 식품이다.

"어렸을 때는 호박 먹기가 왜냥 싫었는지 몰라유. 신 짠지에 호박 가셔(썰어) 넣은 된장만 맨날 먹으니께 신물이 난 거쥬. 그래서 하루는 삽짝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먹기 좋게 매달린 애호박마다 말뚝을 박아 따 버리며 놀다가 엄니가 부지깽이 들고 쫓아오면 냅다 도망갔었유. 해가 져서 집에 몰래 들어오면 윗목에 또 호박잎 넣어서 끊인 멀건 된장 수제비가 퉁퉁 불어 있었는디… 그래도 그 호박 수제비는 맛있었다니께유."

누구에게나 음식에 얽힌 추억만큼은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워지는 법이다. 겨울이면 건넌방 윗목에는 고구마를 얼지 않게 보관했던 고구마 바자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옆에는 늙은 호박도 두어 덩어리는 놓여 있곤 했다. 집안에 해산을 앞둔 아녀자가 있으면 그 호박은 혹여 썩을까 보물 단지처럼 위해졌다.

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고향집 마당과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텃밭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퇴락해가는 고향집 토담 아래 아버지는 가장 먼저 호박을 심고 넝쿨을 올리셨다. 첫째를 제치고 먼저 시집간 둘째 딸에게 태기가 있어서 당신 손으로 직접 재배한 호박으로 몸조리를 시키시겠다는 뜻이었다.

"너도 얼른 시집가. 그래야 아빠가 심은 이 호박으로 몸조리하게 해주지."
"에이, 아빠는 그깟 호박 때문에 맏딸을 헐값에라도 처분하고 싶으세요?"
"너도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심정을 알지."

 산모들의 보약. 튼실한 대박 호박들

산모들의 보약. 튼실한 대박 호박들 ⓒ 오창경


내리 세 딸을 둔 아버지는 첫 딸부터 순서를 지켜 시집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을 겨우내 늙은 호박을 안방 문갑 위에 장식품으로 놓아두고는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달래시는 것 같았다. 행여나 그 호박이 해를 넘겨서도 제대로 쓸모를 못 찾을까 안달을 하셨다. 썩기 전에 호박죽으로 끓여 먹어 버리겠다는 엄마의 성화에도 그 호박은 겨울을 나고 봄이 늦어서야 처분되곤 했다. 노처녀 큰 딸이 신랑감을 데리고 올 날을 기다리셨다. 그렇게 두어해를 더 보내고 나서야 큰 딸의 혼사 말이 오갔다.

"요즘은 우리 밭에 호박꽃들이 막 웃는다."

셋째 딸까지도 시집보내고 나서야 신랑감을 데려온다는 골칫덩어리 큰 딸을 보며 아버지도 모처럼 늙은 호박처럼 풍성하게 웃으셨다.

요즘은 애호박만한 크기의 단호박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동네에도 올해는 담배를 수확한 밭에는 거의 다 단호박을 심었다. 단호박은 그냥 쪄 먹으면 고구마 맛이 나기도 하고 속을 파내서 쌀을 넣고 쪄먹는 등의 요리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핵가족이 대세인 요즘에는 단호박처럼 작아서 한 번에 먹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더 실용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고향의 정취가 있어서 더 정겹고 부모 마음이 서려 있어서 더 애잔하고 맛 나는 것은 고향집 토담에 매달린 보름달 같은 붉은 호박일 것이다.

추석 연휴 동안 시골 고향집에 다녀가는 분들, 향수로 가득한 호박 한 덩이씩을 싣고 가세요! 드라마가 있는 부여의 '서동요 호박'도 사가세요!

덧붙이는 글 | <전원주택 라이프> 10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전원주택 라이프> 10월호에도 송고했습니다
#호박 #대박호박 #서동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