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성
문 후보의 주민등록 초본을 보여달라는 말에 흔쾌히 세 장짜리 초본을 들고 나왔다. 후보 캠프에서 며칠 전 부탁한 것을 복사해뒀다. 1978년 결혼하고 3년간 시댁살이를 한 뒤부터 9번 전셋집과 자가 주택을 옮겨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옛날에는 전세 재계약을 1년마다 했어요. 처음 분가해서 700만원 전세로 나왔는데, 다음해에 2배로 뛰는 거예요.지영이 아빠(문 후보)가 퇴근해서는 아이를 업고 구로동에 사는 집주인을 찾아갔어요. 사정 좀 해보려고요(웃음). 그랬는데, 결국 조금밖에 못 깎고, 전세금 거의 다 냈어요."박씨는 아파트 전세가와 매매가 등을 통해 잠실과 서초동·가락동 등 문 후보의 회사인 유한킴벌리(강남구 대치동) 인근을 맴돈 '역사'를 일일이 설명했다.
한번은 30평 삼풍 전세 아파트(서초구 서초동)에서 자기 소유인 60평 현대 까르띠에 아파트(강남구 역삼동)로 평수를 대폭 확장한 적이 있다.
노조원들이 집을 놀러왔을 때 "사장님이 이런 데 사시냐"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집을 넓혀야 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 자금 조달에 대해서는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스톡옵션을 팔았나"며 애써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남편 회사 때문에 (강남에만 살았다). 남편이 밤낮, 일요일이고 없이 회사를 가니까, 처음에는 회사 바로 옆에 집을 얻으려고 했어요. 최대한 가까이 간 게 선릉역 근처였죠. 하루는 남편이 밤 12시 넘어까지 일을 하다가 경비가 건물 전체를 소등하는 바람에, 남편이 더듬거리며 지하 주차장을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오다가 넘어지고 상처가 생기고…. 그러니까 분당 같은 데로 이사를 가면, 남편이 힘들어서….""남편의 대선 출마, 아직도 반대한다"그렇게 밤낮없이 회사만 생각하던 남편이 처음으로 아내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 박씨의 표현대로, 남편은 말도 없이 대선 레이스에 '뛰쳐나갔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쓴 문 후보에 대해 '간 큰 남자'라고 농을 건네자, 박씨는 "지금까지도 계속 (대선 출마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전 그냥… 사장을 하면서 회사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사회에서도 남편 칭찬을 많이 하잖아요. '깨끗한 사람' '환경운동 하는 사람' 등 이미지가 좋았어요. 존경받고, 일 잘 하고, 안정된 게 좋았어요. 그런데 전혀 새로운 분야를, 이렇게 상황도 안 좋은데. 한 상대방(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은 거의 대통령된 것 같잖아요(웃음)."박씨가 남편의 출마선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떠올렸다. 소심한 A형 아내가 '만사긍정'인 O형 남편을 만나 30년 결혼생활의 첫 고비를 맞은 셈이다.
"이 싸움이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아닌가, 당신이 희생양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정말 두려웠어요. 저 쪽은 벌써 정치를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이고, 매머드급 참모진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당신은 '조직'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안 나오더군요."박씨는 최근 "좋은 생각만 합시다"는 구절을 부엌 냉장고 문 앞에 써 붙였다. 그 옆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마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긴 글을 붙여뒀다. 요즘 부쩍 마음에 와 닿는 말이란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어서 12월 19일(대선일)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매 맞기를 기다리고 있는 심정이란다. 낮은 인지도를 극복하기 위해, 하루라도 붙잡고 싶은 남편과의 마음과는 정반대다.
"(남편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우울증 비슷하게,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괜히 눈물이 나왔어요. 그런데 12월까지 이렇게 울면서 지낼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 '그냥 나도 앞으로 걸어가자' 싶더라고요."그는 남편의 대선 출사표에 "찬성은 아니고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멀찌감치' '비협조적으로'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아직 문 후보의 대선 사무실도 가보지 않았다. 인터넷 서핑 실력이 모자란 탓에 문 후보의 인터넷 팬카페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음이 이것저것 복잡해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라며 "그럴 때는 걷는 게 가장 좋아요, 아파트 단지 안에 멋진 나무들이 많은데 나무들만 열심히 봐요"라고 웃는다.
하지만 그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박씨는 매일 신문을 꼼꼼히 살핀다. "요즘 (신문에서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더고요, 열심히 구석구석 외워요"라며 "신문을 다 보고, 인터넷(포털사이트)을 통해서 뉴스를 또 봐요"라고 말했다. 가끔 "저녁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외부 요청도 생겼다.
"갖고 있는 재산 40억... 도곡동 아파트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