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 한 가마(더플백), 마실 물(수통), 낫(개인화기), 책(야전교범)
박상익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느지막한 오후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고, 친척 어른 몇 분들이 먼저 오셔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추석 당일뿐. 나이는 제일 어린 녀석이 집안일에 큰 도움도 주지 못한다니, '먹고 대학생'이 따로 없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니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든 아버지의 호출.
"너 갱변(섬진강변) 밤나무 밭에 내려가야겠다." "네? 왜요?" "요새 밭에 몰래 들어가 밤을 훔치는 놈이 있다. 얼마 전에 서당골 밭에도 어떤 놈들이 싹 쓸었단다. 지켜야하지 않겠냐."연휴 특선 영화를 볼 생각에 느긋해진 제게 난데없는 '특명'이 떨어진 셈입니다. '어느 인삼밭이 털렸다더라 농산물 도둑이 기승이더라' 하는 뉴스를 보기만 하다가 우리 집안이 그 피해자가 됐다는 말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특선 영화를 보고자 했던 나의 꿈은 어느새 물거품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고, 졸지에 야간 경계근무를 서게 된 것입니다.
매복 중이다, 도둑들아 조심해라이미 달이 뜨기 시작한 밤. 밤나무밭에는 할머니와 삼촌이 비닐천막을 깔고 누워계셨습니다.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려 했지만 손주와 이야기하시겠다는 통에 결국 셋이 밤나무밭에 누웠습니다. 모기향을 피우고 플래시와 몽둥이를 챙기니 정말 매복 작전이 따로 없더군요.
군대를 면제받았던 삼촌은 제가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들어주십니다. 군대에서 이렇게 밤을 지새워봤냐는 말씀에 혹한기 훈련이 생각났습니다. 강원도 화천의 추위는 정말 살인적이죠. 엄살이라고 타박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하 10℃를 밑도는 실내온도에서 잠을 청하다 새벽에 일어나 경계작전을 나갈 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저주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야영 아니겠습니까.
할머니와 삼촌은 집안 대소사(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부부싸움 이야기와 유산 정리 이야기, 거기에 장남의 학교 성적 이야기 등등)를 두고 몇 시간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저는 그 시간에 여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거기 멧돼지 조심해~'여자친구가 멧돼지를 조심하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섬진강변에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로 옆 국도를 씽씽 지나는 트럭이 더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또래들이 시골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혹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야영을 하고 있다니,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특권 아닌 특권을 톡톡히 누린 셈이지요. 하지만 감기 기운이 다 떨어지지 않은 탓에 저는 자정이 조금 지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5시간 동안 경계근무는 이상 없이 했으니 밥값은 한 것 같습니다.
밤나무밭 경계 근무 중 이상 무!남들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느라 분주한 아침. 저는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다시 밤나무밭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진 밤들을 정신없이 줍다보니 열 가마는 나왔습니다. 이것들을 운반할 경운기는 감나무밭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으니 오후까지는 고스란히 밭에 가만둬야 할 노릇입니다.
도둑들이 그 달밤에 산을 타가며 밤을 털기도 하는데, 도로근처 밭에 가마로 있는 밤자루를 본다면 얼씨구나 하겠죠. 이번엔 주간 경계 근무입니다. 다리를 다쳐 산으로 움직이기 힘든 저를 배려해주신 아버지의 지시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밤나무 밭에 누웠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습니다. 이리저리 햇볕을 피하며 책을 읽다보니 슬슬 잠이 옵니다. 미국 민중사. 수면제가 따로 없네요. 책을 읽다가 졸고, 일어나서 떨어진 밤을 줍고, 다시 책 읽기를 3시간 정도 반복하려니 지겨움의 파도가 몰려옵니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군대의 경계 근무는 1시간 뒤에 교대자가 내려오지만 여기선 아무도 내려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 그날 하루 종일 밤나무 밭에 누워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동서남북 방위를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대가는 모기떼의 습격과 그을린 얼굴, 땀에 젖은 옷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빈둥거린 놈, 하루종일 땀 쏟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