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상황전개였다. 세계에서 가장 통신이 발달된 미국의 대표가 훈령을 받기 위해 귀국해야 한다니?
‘2007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의 순항 여부를 가늠할 시험대로 주목됐던 이번 6자회담은 수석대표들 차원에서 잠정합의안을 만든 상태에서 이틀간의 휴회에 들어갔다. 여러 정황과 관계자들의 전언으로 미뤄볼 때 휴회를 요청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워싱턴에 돌아가 상사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협의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민감한 문제가 과연 무엇일까?
가장 설득력 있는 관측은 그 동안 북한이 끈질기게 요구해온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 이른바 ‘대북 적대시정책 포기’ 관련 조치들에 대해 워싱턴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 이번 협상이 그만큼 ‘심각한’ 거래임을 반증하고 있다.
힐 차관보나 천영우 한국 수석대표는 이번 회담에 임하면서 비핵화 2단계 행동계획이 “아직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며 그 실질적 의의를 강조한 바 있다. 정부당국자는 “2단계에 들어가면 문서로 규정된 것 이상의 조치들이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돼있다”면서 북핵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2단계 행동계획의 핵심인 핵시설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 등은 북한이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핵 포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자신들이 핵 포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리는 만큼 미국도 이에 상응한 적대시정책 포기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힐 차관보 선에서의 구두 약속을 뛰어넘는 최고위층의 ‘담보’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에 응하는 ‘결단’을 내려 2단계 이행계획에 대한 합의문서가 예정대로 채택된다면 북-미관계는 상상 이상의 속도를 낼 가능성이 높다.
공개되지 않은 잠정합의안의 내용은?
30일 마련된 잠정합의안에 대해 각국 수석대표들은 한결같이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 천영우 대표는 “우리가 요구한 사항은 거의 대부분 반영됐다”고 밝혔다. 회담 초반 다소 냉소적 자세를 보였던 일본과 러시아 대표도 “비핵화의 흐름을 한층 더 앞으로 전진시키는 내용”(일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한발을 내딛는 것”(러시아)이라고 평가했다.
합의안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관계자들이 전한 내용들을 조각조각 맞춰보면 3대 쟁점이었던 ▲핵시설 불능화 ▲핵프로그램 목록 신고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문제 등에 대해 상당히 의미 있는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핵시설 불능화와 관련해서는 영변의 5메가와트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핵연료가공공장 등 3개 시설에 대해 핵심부품을 제거해 약 1년 정도 복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합의구조가 깨지지 않는다면 이 1년 안에 이들 시설의 폐기를 위한 절차에 착수하게 된다.
핵프로그램 목록 신고의 핵심은 플루토늄과 우라늄농축계획(UEP)이다. 천영우 대표에 따르면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북한이 지금까지 얼마를 생산해서 어디에 사용했고, 남은 양이 얼마라는 것을 정확히 신고하고 검증까지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UEP에 대해서도 북한은 신고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회담관계자들이 전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합의문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불능화와 신고의 시한으로 ‘연내’라는 목표도 당초 계획대로 잠정합의문에 들어갔다.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문제는 북한이 요구했던 ‘연내’라는 시한이 잠정합의문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북-미간에 어떤 형태이든 별도의 약속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연내’가 명시되지 않은 잠정합의문에 동의한 것도 전향적 자세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북한에 대한 보상조치와 관련 한•미•중•러 4개국은 번갈아 가며 매달 5만t씩 중유 45만t을 북에 제공하고, 나머지 중유 50만t 상당은 발전소 개보수 설비로 지원한다는 내용도 잠정합의문에 담긴 알려졌다.
남북정상회담 영향은?
이 같은 잠정합의문을 각국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아 발표키로 한 시한은 공교롭게도 남북정상회담 첫날과 겹친다. 정확한 발표 시점에 따라 정상회담 분위기에 다소 영향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방향이 잡힌 만큼 근본적 영향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마지막 돌발변수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나, 각국 수석대표 차원에서 마련한 잠정합의안을 어느 나라도 뒤집기는 부담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진행 속도에 따라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2일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실질적인 최종채택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의 2단계 이행계획이 사실상 마련됨으로써 북으로 향하는 노 대통령의 발걸음은 일단 가벼워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재다짐을 받아야 하는 부담은 덜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상회담에서의 비핵화 논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6자회담 프로세스를 추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남북 공동번영이나 민족통일, 남북대화 정례화 등의 의제들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
남북관계와 6자회담은 이제 본격적인 선순환 구조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7.10.01 09:33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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