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아직 현 고든 브라운 총리임기가 2년정도 남았건만 때아닌 선거열기가 후끈 달아올랐었다. 결국 지난 일요일(7일) 브라운 총리가 조기선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해 근 한달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기는 끝이 났지만 이 같은 때아닌 선거 논란은 총리가 언제든 여왕에게 선거를 요청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의 독특한 특성상 가능한 일이다.
이번 선거열기는 지난해 블레어 말기 내내 보수당 새 당수 캐머런에게 뒤처지던 노동당 지지율이 고든 브라운 새 총리 등장 이후 줄곧 앞서자 이 분위기를 틈타 얼른 선거를 치르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 노동당과 정부 고위 정치인 사이에서 조기 선거설이 심상치 않게 흘러나오자 언론의 관심은 '언제 선거하냐'에 쏠리기 시작했다.
얼핏 대단히 불공정하고 이상한 선거제도지만 이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아무도 없다. 오히려 발끈할 것 같았던 보수당 측에서는 '할테면 어서 해라'라고 되레 강공을 펼쳤다. 소문만 흘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서서 얼른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다. 이같은 양당간의 접전은 전당대회 시즌에 맞춰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전당대회. 우리나라에서야 흔히 잔뜩 흥을 돋우고 시끌벅적한 하루치기 행사를 연상하지만 여기서는 가히 전당정치의 꽃이라 할 만 하다.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며칠동안 매일 같이 다양한 주제와 정책영역에서 토론하고 담당 정치인의 연설이 이어진다.
때로 당내 논란이 되는 사안은 표결에 부쳐져서 당 지도부와 반대 결론이 나오는 일도 종종 있다.(이번에 노동당에서 이를 없애고, 정책차관과의 개별 면담과 당 선거정책 표결 등으로 대체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당대회에서 지난 한해동안의 정당 활동이 결산될 뿐만 아니라 향후 1년동안 굵직한 아젠다가 설정되고, 주요 추진 정책들이 발표된다는 점이다.
전당대회 기간 내내 이어지는 장관(의원 내각제에서는 다수당 국회의원이 장관)과 예비 장관(집권당이 아닌 경우도 집권당 장관에 대응하는 예비 장관들이 포진해 있다)의 연설이 그 역할을 하며 백미는 당수(집권당의 경우 총리) 연설이다. 이 연설은 다음날 종합지 첫머리 기사를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
이 자리를 빌어 지난달 25일, 포문을 먼저 연 것은 총리로서 전당대회 첫 연설을 한 고든 브라운이었다. 이 때 고든 브라운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주거·치안·보건의료 부분을 중심으로 정부 정책 보따리를 쏟아냈다.
노동당 새 총리 고든 브라운, 전통 보수당 의제 선점
주거 부분에서는 ▲1997년 대비 2010년까지 집소유자 200만명 증가 ▲10개의 새로운 생태마을 건설을 약속했고, 치안부분에서는 보다 강력한 처벌과 예방을 강조하면서 ▲최근 심각성을 더해가는 총기범죄를 막기 위한 경찰의 검문권한 강화를 예로 들었다.
또한 보건의료 부분에서는 ▲병원내 감염 감축을 위한 연내 병원 청결 계획수립 ▲병원 감독관을 두 배로 5000명으로 증가시키고 기준미달한 병원청결업체 계약무효권한을 부여하는 등 현재 문제점을 대처함과 동시에 ▲47세에서 73세까지 유방암검진 확대 ▲지역 보건소(GP) 접근권 확대와 모든 성인을 위한 건강검진으로 보건의료서비스 개인화를 새로운 서비스 강화 방안으로 내놓았다.
그 동안 신노동당 정부에게 비난의 초점이 되어 왔던 대외 정책 부분에서는 ▲이라크와 아프칸에 안보, 정치적 화해, 경제재건 추진, ▲다푸어 사태 정의 실현 등을 강조했다. 이미 외무장관이자 신노동당의 차기주자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밀리반드는 자신의 연설에서 "왜 세계 무슬림들이 영국에 등을 돌리는지 지난 10년의 경험에서 배울 것이다"고 수차례 강조하면서 이전 블레어와는 외교정책에 있어 분명한 선을 그을 것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브라운은 자신의 연설에서 특이하게도 '보수당'이나 당수 '캐머런'을 단 한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보수당이 전통적으로 강한 치안부분이나 캐머런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건의료 부분에 새로운 강력한 대책들을 쏟아냄으로서 그 다음주에 예정된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캐머런이 설 땅을 선점해 버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에 힘을 받았는지 전당대회 이전 4~5%를 앞서던 브라운 지지율은 40%를 넘기면서 가장 크게는 보수당 당수 캐머런과의 격차를 11%로 벌려놓았다.
캐머런, 원고 없는 한시간 격정 연설로 대대적 반격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어진 주말에는 브라운의 선거일 결정이 임박했다는 뉴스가 방송과 신문을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보수당 전당대회장에 도착한 데이비드 캐머런이 '반격(fight back)'을 선언하며 오히려 조기 선거를 발표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단호한 모습으로 연단에 오른 캐머런은 장장 1시간에 걸쳐 원고 한장 없이 열정적인 연설을 펼쳐 그 으름장이 허장성세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캐머런은 보수당의 전통영역을 선점하려 했던 브라운의 정책들에 대해 '나는 좌와 우를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브라운의) 낡은 정치를 벗어나 신념에 의한 정치를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를 풀어놓았다. 우선 보수당 전문 영역인 조세 영역에서 ▲상속세는 백만장자(약 자산 18억 이상 소유자) 이상부터만 적용 ▲첫 주택구매자에게 인지세 면제 등을 통해 주거부분까지 포괄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더불어 가족가치를 복원하겠다며 ▲결혼가정에게 세금공제 혜택 확대, 자녀 양육을 위해 유연한 근무시간 등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단순한 감세 정책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감세분은 환경관련 조세로 대체할 것임을 여러 차례 이야기 한바 있다. 이번 연설에서도 환경과 기후변화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강조했다. 그리고 보건과 교육 영역에 있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불필요한 행정절차 간소화를 통해 효율화 시키고 복잡한 규범보다는 전문적 역량을 강화시킬 것임을 역설했다.
캐머런의 열정적 연설과 자신감 넘친 모습이 통했는지 지난 금요일자(5일) 뉴스에서는 다시 3%차로 줄어든 지지도 수치들이 일제히 보도되었다. 가디언의 조사에서는 심지어 노동당과 보수당이 38%로 동률의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진검승부는 누가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는가에
하지만 원래 각 당의 전당대회가 주목을 받는 만큼 전당대회 기간과 직후 해당 정당 지지율 상승 현상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4~5%의 다시 전당대회전 격차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결국 고든 브라운이 조기 선거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모양상 선거도 하기 전에 브라운 총리가 캐머런에게 1패를 당한 꼴이 되었다. 이들의 연이은 전당대회로 벌어진 불꽃튀는 정책대결은 보는 이로서는 이미 100일도 안남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보다도 흥미진진했다.
물론 현재의 두 정당 간 대결은 아직 진검승부에 다다르진 않았다. 블레어와 차별화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브라운도, 이에 도전하는 캐머런도 아직까지 정책 나열 수준을 넘어서는 종합적인 비전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이 곳 언론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결국 향후 언제 선거가 치러지던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는 누가 확고하고 설득력 있는 비전과 통합적인 정책을 제시하느냐가 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우리나라 정치수준에서는 아직 꿈에 불과한 이러한 정치권의 모습은 영국 정당정치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심도있는 분석과 객관적인 비교를 충실하게 제공해주는 가디언이나 타임즈 같은 고급지(quality paper)와 BBC나 채널4 뉴스 같은 방송뉴스들이 있기에 또한 가능한 것일 것이다.
브라운의 꼼수, 오히려 역풍 |
노동당 전당대회 직후 이라크를 깜짝 방문하여 '크리스마스 전 1000명의 군인을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하겠다'고 발표했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오히려 역풍을 심하게 맞았다. 이내 언론에서 그 중 500명은 이미 돌아왔거나 돌아올 예정이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이같은 언론 플레이는 그동안 브라운이 약속했던 '보여주기 보다는 내용이 있는 정치'와 몹시 대조적이었던 탓에 타격은 더욱 컸다. 또한 이 깜짝 방문은 '반격'을 선언한 보수당 전당대회를 첫째날 이루어졌기에 보수당의 강한 반발을 샀다. '사진을 위한 방문'이었으며 '군인들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영국정치에서는 흔치않은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이는 아마도 브라운이 선거를 발표하기 전에 연이은 주요 방문과 정책 발표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기 위한 전략의 시작이었던 듯 했다. 이번 주 국회가 개원하면 결산 결과 발표, 예산안 발표 등 굵직굵직한 정책 발표 일정이 줄지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첫 방문부터 역풍에 시달리고, 보수당 전당대회 후 지지율 격차가 급감하자 출발부터 삐걱거렸던 셈이다. 이 해프닝은 꼼수가 잘 통하지 않는 영국의 정치환경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이렇게 잘 풀리지 않았던 브라운의 전략이 결국 조기선거를 포기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 |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idea.borong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0.08 08:22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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