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8일, 경남 거창군에 있는 나비한약국을 방문했다. 추석 연휴 직후, 게다가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 선 택시 때문인지, '낯선 동네'가 더욱 한산해 보였다. 잠시 후 10분이나 달렸을까. 택시 미터기 요금은 어느새 8천원에 육박하고 있었다. 거창 중심에서도 꽤 먼 곳에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눈앞에 '(주)나비네트웍스'란 글자가 나타났다. 산 그림자 아래 숨어 있는 한적하기만 한 동네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가설건물. 지난 8월에 거창 나비한약국 준공 소식이 꽤 많이 보도됐던 탓에 거창한 '그림'을 상상했지만, 기대에는 많이 못 미치는 수준. 이 곳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한방 네트워크가 쓰는 한약을 전문 제조한다?
이런 실망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의생명의과학연구소 탁건태 책임연구원이 밝은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인사를 나누고 2층 탁 연구원 책상 앞에 마주 앉았다. 달랑 노트북과 전화기 각각 한 대, 휑하기는 역시 겉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장 설비도 아직 정상 가동 단계가 아니다. "개업 준비중인 회원사가 많고, 이에 따라 아직은 대량 주문이 발생하지 않고 있어서"다.
탁 연구원과 함께 우선 2층 제조 시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선 커다란 탱크 두 개가 눈에 띈다. 먼저 한약재를 추출하는 탱크, 한꺼번에 많은 약을 달이는 일종의 대형 '약탕기'다. 나비한약국의 핵심 기능인 '공동 탕전(가열해 액을 짜는 방식)' 1차 과정을 수행하는 시설로 "한꺼번에 3∼4백개까지 조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동일 처방 한약재를 나비네트웍스 소속 회원사들에게 대량 제조·공급하기 위한 기본 설비다.
하지만 나비한약국 핵심 기술은 바로 옆에 있는 탱크에 숨어 있다. 2차 과정으로 '대형 약탕기'로 추출된 한약재를 농축하는데, 나비네트웍스 박기태 대표가 "국내 유일의 기술"이라고 자랑하는 저온농축 탱크다. 탁 연구원은 "고온 농축했을 때는 약효 성분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저온감압 농축으로 한약재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농축 한약은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다. 일반적으로 한약 파우치팩(포장 봉투, 비닐팩 종류가 많다)이 많이 쓰이지만, 나비한약국은 20ml짜리 유리병을 사용한다. 한약을 유리병에 담는 것에서 상표 부착 역시 모두 자동으로 처리된다.
이같은 '공정'은 외부로부터의 오염 가능성을 줄인다. 탁 연구원은 "일반 약탕기를 사용하면 같은 양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달여야 한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많은 양을 한 번에 달이고, 또 약재 투입부터 최종 출고까지 모든 과정이 자동화된, 약탕기처럼 뚜껑을 열고 닫을 필요가 없는 일종의 클로징 시스템이다. 그만큼 외부 오염 확률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한약재 안전성을 높이면 1차적인 혜택은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나비네트웍스 회원사는 대량 조제로 인한 원가 절감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비네트웍스는 이와 같은 '공동 탕전' 과정을 통해 표준화를 제고할 수 있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탁 연구원은 "소량씩 하다보면 탕전 시간이나 약탕기 예열 상태에 따라 조제 과정이 달라질 수 있지만, 한꺼번에 탕전하면 똑같은 환경에서 한약이 만들어짐으로써 표준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양약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우수의약품 제조를 위한 요건들을 구체화한 기준)와 같은 기준을 세워 소비자들이 믿고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전성 제고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또 검사다. 현재 나비네트웍스는 한약재 출고시에 나비한약국에서는 미생물 검사를, 한의생명의과학연구소에는 중금속·농약 등 유해성분 분석 검사를 하도록 하고 있다. 검사 주기는 "탱크를 돌릴 때마다 매 번"이라고 한다.
탁 연구원은 "약 하나 팔면 17∼25만원 정도 하는데, 그때마다 5만원에서 7만원 정도 드는 분석 검사를 한다는 것은 개별 한의원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며 "하지만 우리는 제조 단위가 큰 만큼, 그 정도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탁건태 책임연구원은 현재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다. 아내와 두 자녀는 창원에서 거주한다. 탁 연구원이 한의생명의과학연구소를 통해 나비네트웍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올해 2월. 연구소가 수원으로 이사가고, 자신은 나비한약국에 '명'받으면서 졸지에 '주말 부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 그의 임시 거처는 나비한약국 2층에 있는 휴게실. 밤에는 혼자다. 탁 연구원은 "너무 조용한 곳이다 보니, 처음에는 밤에 무섭기도 했다"면서 "지금은 익숙해져 괜찮다"고 말했다.
현재 나비한약국에 출근하는 직원은 5명. 탁 연구원은 "모든 설비가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이 정도 인원으로도 감당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공동 탕전이 본궤도에 오르면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소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탁 연구원은 한의학과는 '가깝고도 먼' 직장에서 일했다. 발효공정개발 전문가로 제약회사에서 7년 정도 근무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매일 오마이뉴스를 챙겨보는 애독자"라며 "기존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주문하기도 했다.
한의생명의과학 연구소의 '첫 인상'은 거창 나비한약국과는 확실히 달랐다. 첨단 생명공학 산업화 지원을 위해 수원에 설립된 경기바이오센터 13층, 200여평 규모의 연구소는 바로 나비네트웍스의 '작전본부'로 손색이 없었다. 한약 표준화와 신약 개발의 핵심인 연구소를 방문한 것은 지난 2일.
연구소는 나비네트웍스 박기태 대표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한의생명공학회 부설 연구 기관으로 2002년에 창원에서 출범했다. 연구소 인력은 박사급 연구원 7명, 석사급 연구원 4명 등 비상근직을 포함 20여명. 이들이 그동안 보여준 실적은 눈부시다. 외용치료제(피부에 바르는 약) 등 43종, 내복약 25종을 개발했다. 연구소가 만든 한약제조장치만도 6종에 이른다.
창원 연구소 시절부터 박기태 대표와 함께 했다는 김학주 연구소장(42). 2002년 6월에 "뭔가 한의학 발전에 기여할 만한 방법을 찾고 있던 박 대표와 만난 것"이 출발이었다. 생물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낯선 학문이었지만, 연구를 거듭하며 "한의학에는 분명 뭔가 있다"는 생각을 굳혔고, "생명공학이 한의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충분히 검증된 약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고 한다.
특히 '본부'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연구소 규모와 인력이 확대됐고, 이에 따라 천연물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 소장은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공개하겠지만, 현재 국내 특허 뿐 아니라 국제 특허까지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고 밝혔다.
발효 한약 연구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 사람에 따라 인삼 약효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인체에 있는 유산균 등 장내 세균 숫자 등 개인차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인삼을 먹기 전에 유산균 등을 이용해 체외에서 발효시켜 복용을 하는 원리가 발효 한약의 핵심. 현재 제품화를 위한 '검증'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금속이나 농약 등 유해 성분 분석 검사도 연구소 핵심 기능 중 하나다. 검사 대상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한방제약회사가 나비네트웍스에 공급하는 한약재 그리고 창원 나비한약국에서 제조되는 한약이 해당된다. 재배지를 추적해서 지표 물질을 분석하는 한약재 표준화 작업 역시 진행중이다. 김 소장은 "국가 차원의 표준화 사업 샘플(예)을 먼저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 장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연구소는 생명공학 연구에서 기본적인 원심분리기에서부터 첨단 기기로 알려진 '라이브셀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다. 이렇게 장비를 갖추는데 든 예산이 "25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학회 부설 연구기관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라이브셀 이미지'는 "살아 있는 생물체에 약물을 투여한 결과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기기로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이른바 '젓가락 영상'으로 널리 알려진 실시간 세포 촬영기보다 진일보한 장치"라는 것이 김 소장의 설명이다.
김 소장의 자랑은 "대단합니다, 저 사람"으로 이어졌다. 김봉조 부소장을 이르는 말이다. 김 부소장은 미 국립보건연구원(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출신으로 2년 전에 알코올에 의해 간암이 유발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런 연구 성과로 인해 김 부소장은 미 국립보건연구원에서 2006년, 2007년 연속으로 최우수 과학자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독일 괴팅엔 대학 출신 이철원 박사(동물생리학, 창원대학교 겸임교수)나 한림대 의대 출신 오수진 박사(생화학), 설순우 박사(질량분석), 이승재 박사(일본 쿄토대학 효소공학), 탁건태 박사(발효 공정 개발) 등이 한의학 '비상'을 위해 모여 있다.
물론 나비네트웍스가 어디까지 날아오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시스템은 존재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가동하지 않은 상태다. 또 합의된 표준을 따르지 않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별종 나비'가 튀어나온다면, 나비네트웍스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끼리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나비네트웍스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의학에 미친 사람들'이 일으킬 '나비 효과'가 벌써부터 궁금한 이유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