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노동자 정은호 님이 온몸으로 써낸 시를 모은 책입니다.
갈무리
- 책이름 :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 글 : 정은호
- 펴낸곳 : 갈무리(2003.10.30.)
- 책값 : 6000원<1> 어떤 끝을 볼 수 있을까
엊저녁, 잠깐 밤마실을 나옵니다. 언제 사 두었는지 알 길이 없는 김빠진 맥주 하나가 냉장고에 있더군요. 날이 차츰 쌀쌀해지고 있기 때문에, 머잖아 냉장고 돼지코를 뽑을 생각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를 돌렸지만, 추운 겨울에는 냉장고를 쓰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다치지 않아요. 마음 같아서는 여름에도 냉장고를 끄고 싶으나,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더군요.
아무튼, 냉장고에 들어 있던 맥주를 치워내야 하기에, 안주거리 될 만한 과자부스러기라도 살 생각으로 동네 구멍가게로 찾아갑니다. 8시만 되어도 가게문은 거의 다 내리고 조용해지는 배다리 골목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쉬는 날
저녁시장에 갔던
아내가 내온 방울토마토웬 방울토마토?
퉁명한 내 말에
요즘 시장에서 제일 싼 게
방울토마토라 한다 … <방울토마토>사람도 뜸하고 차도 뜸한 길을 설렁설렁 걸어갑니다. 얼마 앞서 다시 연 ‘24시간 불가마 찜질방’을 왼쪽으로 끼고 걷습니다. 저 찜질방은 이 동네에서 얼마나 장사가 되려나. 예전에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았을 텐데.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산업도로를 닦는다며 파헤쳐 놓은 길 옆을 지납니다. 그나마 마을 분들이 힘을 모아서 이 공사를 멈추게 했지만, 개발업자는 언제 다시 삽날을 들이밀지 모릅니다.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m짜리 산업도로라니…. 참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요,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입니다. 동네사람들도 참 어리석었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개발업자와 인천시 담당공무원 들은 ‘여느 길 하나 닦는다’는 거짓말로 동네사람들을 속였더군요. 아무렴. 컨테이너차나 덤프가 씽씽 내달리는 산업도로를 닦는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어느 누가 도장을 찍어 주었을까요.
양손에 수갑차고
끌려가지 않아도
감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우리들 생존의 벌판
깊숙이 파고든 손길노동자 관리리스트
A, B, C 등급
A : 특별 관리대상
B : 잡무 우선배치
C : 특근 잔업 전혀 없음 … <구속 2>
할배와 할매가 번갈아 지키는 구멍가게로 들어갑니다. “안녕하셔요”하고 고개숙여 꾸벅 인사를 합니다. “어!”하고 인사를 받는 할배는 가게 불을 켭니다. 손님이 들어올 때에만 가게 안쪽 불을 켭니다. 할배는 텔레비전 역사연속극을 보고 있습니다.
과자부스러기 몇 점을 집다가, 막걸리도 한 병 집습니다. 늘 마시던 소성막걸리는 다 떨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누룽지막걸리를 집습니다.
우리가 고른 물건이 셈대 위에 놓이니, 할배는 뒤쪽에서 주판을 꺼내어 톡톡톡 알을 놓습니다. 속으로, ‘아이고, 사진기 가지고 나올걸. 잠깐 나온다며 사진기를 괜히 놓고 왔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 할배가 한 마디 건넵니다. “옥상에 있는 꽃 사진으로 찍지 않을래?”
일요일 한 번 쉬어 보는
절실한 노동자들
다 버려 두고통념도 상식도 다 무시하고공공부문
몇 천 명 사업장
먼저 쉬어야 하는가공익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사업장보다
선방공 용접공 쉬는 게
더 나을 것이다노동강도를 따져 보아도
근무조건 열악한
작은 공장 노동자들
먼저 쉬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몇 천 명 쉬는 것보다
몇 명 쉬는 게 더 쉬울 것이다 - <주 5일 근무 2>할배는, 셈을 마친 뒤 가게문을 잠깐 내리고 우리를 이끌며 가게 옥상이 올려다보이는 골목 안쪽으로 갑니다.
“저기 하얀 꽃 보이지? 희귀한 꽃이라는데 참 예쁘게 잘 피었어.”
“그러네요. 지금은 어두워서 찍을 수 없고, 내일 아침이나 낮에 다시 올게요.”
“그래, 아침에는 내가 없을지 모르지만, (할머니한테) 얘기하고 사진으로 찍어.”
가지고 온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합니다.
‘할배네 옥상에 온갖 꽃이 가득하던데. 석류도 있고. 그 꽃들을 혼자서만 즐기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하셨을까. 보기 좋은 꽃이라면 이웃들한테도 내보이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으셨을까. 골목길 바깥쪽에 크고작은 꽃그릇을 내놓고 키우는 모든 살림집 어르신들 마음도 이와 같을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화동 어느 집 감나무를 구경하면서 나무가 참 좋다고 말하니 그곳 집임자가 웃으면서 좋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