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반 숲 우리가 바다 말이라고 부르는 해조류이다. 길이가 30m 씩 자라는 것도 있다.
그 숲 바닥에서 한 다이버가 수중카메라를 수면 쪽으로 쳐들고 있다.
장호준
다이빙 마니아의 귀에는 바다가 끊임없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
물론 바다는 아무 말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니아의 귀에는 바다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들어가 봤던 바다 속이 황량하면 황량할수록 다이버는 다음 다이빙을 서두른다. 물론 이것은 아무에게나 오는 증상은 아니다. 이런 느낌이 들면 '자신이 다이빙 마니아가 되어가는 조짐이 보이는구나'하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느낌에 아주 쐐기를 박는 바다가 있지만 그 장소는 개인마다 다르다.
어느 바다의 한 곳에 떨어져 그 지점에 매료되어 버리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봤던 바다가 떠오른다. 비로소 날마다 머릿속에 바다를 그리는 한 사람의 마니아가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사는 D시에서 처음 다이빙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행적은 이제 거의 전설이 되었다. 물이라면 죽고 못 살았던 사람, 평생을 물과 함께 했던 사람,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당시 D시에서는 물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그는 60년대 말에 미국에서 다이빙을 배워 와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다이빙을 보급했다. 물론 나는 그 분이 다이빙 보급을 하며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설령 그가 개인의 호사를 위해 그렇게 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가 다이빙계에 끼친 공적은 무시 할 수가 없다.
그는 다이빙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잠수복이 없어 청바지를 입고 다이빙을 하던 그 시절에 다이빙 클럽을 만들고 다이빙 장비를 사들이고 했으니….
그는 그 눈부신 재화로 배를 전세 내어 남해안을 일주했고 동해안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 시절 다이빙을 꿈도 꿀 수 없던 주위 사람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친 것이다. 물론 이에 필요한 경비는 일체 그가 부담했다.
세월이 흘러 그는 가고, 다만 그의 행적만이 전설처럼 남았지만, 그의 호쾌한 기상과 다이빙에 쏟은 열정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그가 한 시절 즐겨 드나들었던 동해연안 바다 속에 그를 추억하고 기념하는 수중비석을 세웠다.
어민들과의 충돌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다이버가 어촌에 나타나면 동네주민들이 구경을 나왔다. 거기다가 주민들은 어디에 가면 어떤 고기가 있으니 거기에 한 번 들어가 보라든지, 요즘 문어철이니 문어가 보이거든 그냥 나오지 말고 한 마리 잡아주고 가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탱크도 날라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이버에게는 꿈같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민들과 다이버들 간에 서서히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다이버들 때문이었다. 마구잡이 물고기사냥에 일부 다이버들은 바다에 뿌려놓은 전복 등의 종패를 훔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민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충돌이 도처에서 일어나다가 드디어 어민들은 다이버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막기 시작했다. 물론 어민들에게 다이버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어민들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그 다이빙이 기분 좋은 다이빙이 될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