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노동철씨의 묘지앞에서 통곡하는 누나
오문수
머리를 14바늘이나 꿰맨 노씨는 그길로 시민군 차를 타고 저항하다 총을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광주사태 주동자로 함평경찰서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이 됐다. 온 식구가 나서 수소문해보니 광주 상무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고, 소재를 확인했을 때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강원도 진부령 인근 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노씨가 행방불명이 되자 혼인신고도 안하고 동거 중이던 처는 낳은 지 1달된 딸만 남겨두고 집을 나가 버렸다. 당시 서울에 살던 누나(노영애씨)는 울고 보채는 아이를 동네 아줌마들에게서 동냥젖을 먹이고 미음을 쑤어 먹였으나 여의치 않자 마음씨 좋은 부부에게 입양을 시켰다.
심한 구타 후유증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없던 노씨는 결혼하여 아이 하나를 두었지만 부인이 버는 돈으로는 생계가 막막했고, 5·18 민주유공자 보훈혜택을 받으려고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심의에서 떨어지자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식구들은 5월만 되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노씨를 조선대학교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2005년 1월쯤 입양되어 얼굴도 모르는 딸이 훌륭히 자라 아버지를 찾는다는 소식이 왔다.
딸을 거두지 못한 죄책감과 그래도 국가에서 인정을 받고 딸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기를 바란 노씨는 재심을 요청했지만, 또다시 보훈대상 심사에서 떨어지자 광주사건 추모기간인 5월 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누나는 동생이 죽자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억울한 사정을 얘기해 이제나마 망월동에 묻히게 됐고, "보훈대상이 됐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대성통곡이다.
마음이 우울할 때 망월동 동생 묘를 찾아와 울고 가면 답답했던 가슴이 약간 풀린다는 노씨는 "나쁜 놈! 엄마보다 먼저 죽은 놈은 불효자야"하며 또 다시 통곡한다. 노씨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올 1월에 돌아가셨다.
도통 보이지 않던 동생이 추석 때 꿈속에 나타나길래 "그래 살아생전 못 다한 효도 죽어서나 해라"고 했다는 노씨는 울며 비석만 쓰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