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서구문물이 급격히 들어오는 시대 상황 속에서 쇄국정책을 편 대원군이 있었고, 제국주의 세력이라도 끌어들여 급진개혁을 하려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있었다. 그 사이 김윤식∙김홍집∙어윤중 등 온건파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폈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우리 전통 제도와 사상인 도(道)는 지키되, 근대 서구의 기술인 기(器)는 받아들이자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도 물론 있다. 하지만, 서양 것을 무조건 배격하기보다는 한국의 정체성, 민족정신을 유지한 채 서양의 그릇 즉, 우리보다 발달한 기술이나 재료만 빌리자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며 그 이론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복을 디자인하는 데도 이젠 서양에서 개발된 디자인 캐드를 활용하며, 김치를 수출하려고 현대과학이 개발한 밀폐용기를 사용한다. 위대한 난방방법인 온돌을 쓰려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대신 온수 파이프가 들어간다. 이런 것들이 바로 동도서기의 한 예일 것이다.
이런 '동도서기'를 화폭에서 실천하는 이가 있다. 한국미술협회 광명지부장을 역임했던 문창수 화백은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풍물굿만 화폭에 담아온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풍물굿에 빠진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풍물굿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이다. 그 속엔 상모의 선이 있고, 율동미가 있으며, 강한 원색과 기운이 있다. 꽹과리, 징 등 4가지의 화음은 영혼의 소리이다. 그 풍물굿의 기와 율동미를 드러내 보고 싶었다. 또 그리다 보니 그에 푹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이 풍물굿에 넘쳐 흘렀다.
그런데 오랫동안 풍물굿만 그리는 것을 두고 어떤 이는 '너무 우려먹는다' 또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아직 나는 내 그림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풍물의 정신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야 다른 소재로 옮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 숙제는 영원히 풀지 못할지도 모른다. 또 아직은 풍물굿을 소재로 그리는 것이 정말 즐거울 뿐이다."
화폭 속엔 꽹과리, 장구, 징, 북 따위가 어우러지고, 상모의 긴 끈이 휘돌아가며, 세상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공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곳곳에 작고 큰 자취들을 남긴다. 어떤 것은 불타고, 어떤 그림은 신명이 어우러지고, 어떤 화폭은 천지를 진동케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화폭은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소를 통해 민족 정서를 다룬 이중섭과 회백색을 주로 하여 한국적 주제를 서민 감각으로 그려낸 박수근 역시 서양화에 한국적인 정체성을 담은 동도서기의 화가로 인정을 받는다. 문창수에게서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런 생각을 읽었다 해도 그리 잘못된 평가는 아닐 터이다.
문 화백은 말한다. "어떤 정신으로 표현했느냐는 따지지 않고 유화라 해서 무조건 서양화라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도구를 썼느냐보다는 어떤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 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 그림은 서양 도구를 썼지만 분명히 우리 정신이 담긴 풍물을 그렸기에 우리 그림으로 보아 달라."
이 동도서기의 문창수 화백 그림 30여 점은 경기도 광명시 광명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오는 10월 21일부터 25일까지 볼 수 있다. 이 전시회는 광명시의 2007 문화예술발전기금을 지원받았다.
이제 가을이 짙어 온다. 서서히 찬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송강 정철은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라고 노래한다. 이 가을 문창수 화백의 풍물 그림으로 동도서기가 무엇인지 깨달아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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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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