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눈에 덮인 들판.
이보영
"20살 때까지 당근하고 감자 말고 먹어본 적 없어"... 건강엔 도움핀란드 음식에 대한 얘기는 이미 여러 번 (안 좋은 쪽으로) 국제적인 화제에 오르내렸다. "핀란드 음식을 제외하면 영국 음식이 가장 형편없다"는 2005년 파리와 런던의 올림픽 개최 후보지 유치전이 한창이던 때,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영국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려다 보니 어쩌다 핀란드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실언의 결과, 최종 투표에서 막판까지도 다소 우세하다고 전망되었던 파리는 런던에 4표 차로 지게 된다. 파리의 패배 뒤에는 핀란드 IOC 위원 2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라크의 음식 폄훼 발언에 자극받은 핀란드 위원들이 막판에 모두 런던에 표를 던졌다고 추정되었다. 양자 대결에서 2표가 어느 한 나라에 몰리는 것은 4표 차이를 의미한다. 그 당시 핀란드 IOC 위원의 2표가 승부를 결정했다는 기사는 핀란드 신문에서 대서특필된다. 그때 머리기사 제목은 "우리가 해냈다"였다. 그 후 시라크 대통령의 핀란드 음식 관련 발언은 역사상 가장 큰 말실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실언임은 분명하지만 시라크 대통령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나도 처음 핀란드 식품점에 갔을 때 많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사방팔방 봐도 이른바 '땡기는' 식품이 없었다. 채소와 과일 코너도 너무나 부실했다. 종류도 제한되어 있고, 신선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가격까지 비쌌다.
20세가 되기 전에는 당근과 감자 이외의 다른 채소를 먹어 보지 못했다는 핀란드인을 만난 적도 있다. 핀란드 같은 냉대기후에서는 뿌리채소 이외의 다른 채소가 자라기 어렵다.
음식재료가 변변찮다 보니 조리법도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금과 후추만으로 간을 맞춘 단순한 요리를 자꾸 먹다 보니 내 고질병이었던 만성 위염이 어느새 다 나았다. 미식이 건강에 나쁘다는 얘기도 있지만, 맛없는 음식이 때로는 건강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모양이다.
식생활 다음으로 핀란드 사람들의 의생활도 한 번 얘기해보자. 거리에 다니는 핀란드 사람들의 옷차림만 보면 핀란드가 1인당 GNP가 3만8000달러가 넘는 부자나라라는 것을 믿기 어렵다.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지나치게 검소해서 남루하게까지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높은 세금과 물가 사이에서 허덕이다보니 좋은 옷을 살 여유가 없다는 것, 둘째는 치장하는 데 신경을 안 쓰는 실용적인 국민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벼룩시장이나 중고 의류점에서 옷을 많이 구입한다. 이런 의생활의 하향평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 덩달아 나도 치장에 신경을 덜 쓰게 돼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돈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특히 백화점에 갈 때 '차려입지' 않아도 돼서 참 편하다.
살기보단 죽기 좋은 나라?... 그럼에도 핀란드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까닭얼마 전 핀란드인 몇 명과 회식을 할 때 뼈있는 농담 하나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주제가 핀란드가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인가에 대한 것으로 흘렀는데, 그 중 한 명이 재치 있게 말을 받아친 것이다.
"핀란드는 실상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죽기 좋은 나라라구. 정부는 국민이 건강하고 돈 잘 벌 때는 세금만 듬뿍 떼어가고 별 혜택을 주지 않다가 병들거나 직업을 잃게 되면 그때부터 보살펴 주거든. 그러니까 살기보단 죽기 좋은 나라지."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안 좋은 나라?' '죽기 좋은 나라?' 정작 나도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싫지만 그 가운데 좋은 것이 있고, 좋지만 또 그 속에 싫은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 순간 문득, 며칠 전 참석했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이 떠올랐다.
교장 선생님이 전교 학부모를 다 초청한 행사였다. 학교 강당에 모인 100여 명 정도 되는 학부모 앞에서 생각보다 너무 젊은 교장 선생님(30대 중반 정도)이 학교 소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이 학교 교육 목표가 신선하고 또 인상적이었다. '인재를 키운다'가 아니라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 주변 환경이 안전하고 왕따가 없고 아이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학교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이 또 하이라이트였다. 학생 숫자와 선생 숫자만을 보여주는 단순한 슬라이드였다.
학생-153명, 선생님-12명, 보조 선생님-9명.
보조 선생님까지 합하면, 선생님 당 학생 비율이 7명이 좀 넘는다. 교장 선생님은 한 술 더 떠, 선생님을 충원해서 선생님 당 학생비율을 낮추겠다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