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소큰놈은 제법 팔뚝만한 것도 있다. 식용으로 쓰이며 교미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해조류 먹고산다. 수심 5m 조류에 모자반이 옆으로 누워있다.
장호준
서귀포항의 한 낡은 건물 이층에서 다이빙 숍을 하던 사람이 문 섬의 바다 속을 죽어라고 찍어 '제주의 수중세계'란 비디오물을 만들고 공중파를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한 것도 이 시기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사진전은 1985년에 대구에 사는 한 다이버가 열었다. 그는 다이빙과 수중사진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재력가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자 여기저기 수중사진을 찍는 동아리들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수중 사진전을 열어 사람들에게 바다 속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이빙 전문 잡지가 태어나고 다이빙 장비를 생산하는 업체도 생겼다. 여기저기서 수중 문화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이빙에 관련된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겨우 수중카메라가 우리나라의 일부 다이버들에게 퍼져가던 시기였으니까. 이런 업체들의 노력으로 겨우 카메라의 매뉴얼에 대한 번역물이 프린트로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다이버들끼리 열심히 찍어보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그때의 학습방법이었다.(1984년에 수중카메라의 혁명이랄 수 있는 Nikonos v가 나왔다) 이 시기에 수중사진 촬영대회도 시작됐다. 쓰레기통엔 폐기처분한 필름들이 넘쳐났다.
“첨엔 물속에서 발브 팍팍 안 터잤심니꺼, 그래가 우짜든동 흐리하게라도 사람 모습만 나오면 조타꼬 지랄했응께, 지금 생각하믄 코메딥니더.”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중사진기를 들었던 이의 고백이다.
물속이란 카메라에게 가혹한 환경이다. 그러나 이젠 기술이 발달하여 전자동 디카가 물속까지 들어왔다. 제대로 모습만 나오는 사진 한 장을 건져도 희희낙락하던 시절에 비하면 카메라의 왕초짜도 들어가면 그런대로 볼만한 사진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뭔가 억울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하지만 그 시절은 그 시절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다이빙의 태동기랄 수 있는 70년대에는 잠수의학에 대한 지식은 고사하고 다이빙 매뉴얼도 변변한 게 없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다이빙 교육도 없이 친구가 놀러 가는 데 따라갔다가 골수 다이버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는 다이버 중 한 명이 배가 아파 다이빙을 들어가지 못해 장비가 남자, 친구가 “고마 니가 대신 저 장비 갖고 따라 들어가자” 해서 얼떨결에 들어간 경우였다. “숨만 쉬다 안 나왔심니꺼. 물도 얼매나 뭇던지…” 그가 웃으며 한 말이다.
다이빙 사고 중에 아주 위험 것이 있다. 감압병이다. 오랜 잠수 후 갑자기 상승하면 외부압력이 급격히 낮아지므로 몸 속의 질소가 과포화된 상태가 되어 인체 조직이나 혈액 속에서 기포가 발생하여 감압병이 발생한다. 결과는 엄청나서 발생부위에 따라 반신불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상승속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이야 기본 장비 중의 하나이지만 BC(부력조절과 탱크를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조끼)가 처음 나오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며 사부가 들려준 말이다. BC라는 장비가 있기 이전에는 자신의 다리 힘에 의존해 오리발을 차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게 전부였다.
“그거 첨 입응께 조은기라요. 오리발을 열씨미 안 차도 밑에서 공기 가뜩 너어노으마 올라오민서, 압력이 나자지니까, 공기가 부풀지요, 그러면 속도가 붙터서 물 위로 뽕뽕 튀어 오르는기라요. 그걸 재미있다고 들어갈 때마다 했응께로, 디지는 줄도 모리고….”물론 그렇게 한다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감압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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