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콤플렉스 경연장 <왕과 나>

'콤플렉스'에 죽어가는 여성의 주체성

등록 2007.10.27 20:05수정 2007.10.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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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를 보는 길잡이 '페드라 콤플렉스'

김성홍 감독의 <올가미>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며느리에게 광적인 적개심을 느끼면서 며느리를 죽이려 하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넌 내 아들에게 사준 장난감에 불과해"

이런 류의 콤플렉스를 '페드라 콤플렉스(Phaedra Complex)'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고대 그리스 신화로부터 비롯됩니다. '테세우스'의 두번째 아내 '파이드라'로부터 비롯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친자식은 아니었지만 테세우스의 장남 '히폴리토스'를 연모했던 '파이드라'의 사랑, 하지만 '히폴리토스'는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사랑했고, 결국 '파이드라'는 이유가 확실치 않은 자살을 합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사랑이 좌절되자 남편 '테세우스'에게 "히폴리토스가 나를 유혹했다"는 모함과 함께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테세우스'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죠. 그래서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죽여달라는 신탁을 빌었고, 결국 '히폴리토스'는 정체불명의 환영을 보고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나마 '의붓아들'이길 망정이지 친자식을 사랑한 이야기였다면 보기 껄끄러운 신화가 전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는 '엄마'와 '아들'의 구도라는 점을 중시하면서, 이 용어를 확정지은 듯합니다.


이 내용은 1962년에 미국에서 <페드라>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습니다. 멜라니 메로쿠리와,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로 유명한 안소니 퍼킨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입니다. 그러고 보니, 안소니 퍼킨스는 '페드라 콤플렉스'와 또다른 인연을 만들게 되는데, 그 인연은 다름아닌 알프레드 히치콕의 대표작 <싸이코>입니다.

<싸이코>의 살인범 '노먼 베이츠'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다양한 흥미거리를 제공합니다. '노먼 베이츠' 자체는 극단적인 기독교 광신도로 추측돼 성욕 자체를 혐오하는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랍니다. 이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에게 아주 극단적인 짓을 저질렀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유부남과의 도피를 꿈꾸던) 여성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 모자 관계, 잘 살펴보면 콤플렉스 범벅입니다. 어머니가 다 큰 자식에게까지 '영향력'을 주는 것에서 우리 영화 <올가미>에서처럼 아들의 사랑을 막아버린 어머니의 '페드라 콤플렉스'를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노먼 베이츠'는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성적 콤플렉스 일대기 '인수대비 일가 이야기'

<왕과 나> <왕과 나>의 한 장면
<왕과 나><왕과 나>의 한 장면SBS

여기서, 조선초기 역사를 비극으로 점철시킨 인수대비 모자, 폐비 윤씨 모자를 돌아봅시다.

먼저 인수대비, 20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만 바라보고 사는 답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는거죠. 상대적으로 보다 어린 둘째 아들에게 애정을 더 기울였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봅니다.

<왕과 나>를 보면,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의 갈등이 겉으로 봤을 때는 '정치 논리'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의 기반을 위해서는 공신의 대표 한명회와 손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인수대비는 아들과 중전의 조화를 바라지만, 아들은 윤씨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눈엣가시죠. 게다가, 윤씨는 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계유정난 공신들과 대립하는 '사람'으로 분류해야 할듯 싶은 윤기견의 딸,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선택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의 시선을 배제한다면 인수대비는 <올가미>의 '진숙(윤소정)'과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한명회의 딸은 "자신의 말을 잘 듣겠"지만, 이 꼬장꼬장한 윤씨는 자신의 이야기에 말대꾸까지 하는 등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고분고분한 아들'이 돼야 할 성종 역시 윤씨의 편을 들기 시작합니다.

이러니, 감정은 증오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올가미>나 <싸이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페드라 콤플렉스'에 빠진 엄마들은 '고분고분한 아들'을 원합니다.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분고분함'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추구하다 보니, 아들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려 합니다.

하지만, 성종은 한명회의 딸이 죽은 후에 윤씨를 중전으로 삼습니다. 이 사태를 보며 속이 쓰린 인수대비에게, 성종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분노한 윤씨가 성종의 용안에 생채기를 낸 사건은 그야말로 '이 때다'입니다. 당장 폐출해버린 거죠.

성종의 복잡한 여자관계, 이것은 일종의 '콤플렉스 해소법'이었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다 보면 <싸이코>의 '노먼 베이츠'처럼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이 됐겠죠. 해방구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얼굴에 생채기까지 내는 폐비 윤씨에게서 두렵기만 한 '어머니'를 느꼈을 듯합니다. 그래서 그 역시 아내를 당장 폐출해버린 것일 듯합니다.

훗날, 이 사태는 '피 묻은 한삼'을 본 연산군의 분노를 자아내 피바람을 양산합니다. 할머니 인수대비를 들이받아 죽였으며, 어머니에게 사약을 건낸 사람까지 찾아내 죽입니다. 이 분노, 역시나 '콤플렉스'죠. 연산군은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어머니를 집착하면서 인간이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할 '긴장'을 풀어버린 것입니다.

<왕과 나>가 자극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왕과 나> <왕과 나>의 한 장면
<왕과 나><왕과 나>의 한 장면SBS

왕조국가에서는 중전이나 후궁이 되는 길이 '한방에'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왕과 나>는 내시 김처선의 존재를 '윤씨의 정인'으로 픽션화하면서, 더더욱 고착시킨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데렐라'나 '콩쥐'가 왕비가 되는 과정에는, 선택해주는 왕자님도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독에 몸을 던져 구멍을 막아주는 두꺼비도 있어야 합니다.

<왕과 나>가 '김처선'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이 '두꺼비'입니다. 왕년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혜린(고현정)'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재희(이정재)'가 강한 인상을 유도했던 적이 있는데, 이 구도가 10여 년이 지나 사극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재희'는 목숨을 던졌고, '김처선'은 '성(性)'을 희생했습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그리고 과거에 '재희'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 여성의 야릇한 마음입니다. 자신을 단번에 상류사회로 이끌어주며 부귀영화를 약속해줄 수 있는 '실장님'이 제일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마음을 주지 않아도 아무 조건없이 자신을 위해 희생까지 아끼지 않을 '순정남'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환경임에도,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현실에 없는 남자'를요.

옛날에는 여성의 주체성을 보장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 길 외에는 출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주체성은 곧 어딜 가나 '경제적 자립'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이게 아예 막혀버린 사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여성의 '경제적 자립'은 남성에 비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경제적인 불황과 함께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드라마들이 다시 유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산>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왕과 나>를 보면서 생각나는 <청연>

<청연> <청연>의 한 장면
<청연><청연>의 한 장면코리아픽쳐스(주)

2005년 연말에 '친일 논란'을 일으켰던 영화 <청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대단히 아쉬운 영화죠.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다가 죽고 마는 비극을 그리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하필이면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친일 의혹' 속에 휩싸인 인물을 영화화했으니 말입니다.

옛 여성의 딜레마가 발견됩니다.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도의'까지 저버릴 것인가, 아니면 여성의 인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옛 사회를 수긍할 것인가. 굉장한 딜레마입니다. 이 문제를 던져놓으면 누구도 장고를 거듭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문항이라는거죠.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마땅히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실장님'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없는 김처선'을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억압적인 현실, 그리고 <청연>이 선보였던 딜레마와 싸워야 합니다. 방송은 어차피, 시청자의 의식 그 자체를 보여주기만 할 뿐 해답은 주지 않습니다. 해답은 스스로 싸워서 얻어야 합니다.

'콤플렉스'란 대개 복잡한 현실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실의 해답은 스스로 얻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현실의 해답까지 발견하려 한다면, 여성을 떠나 인간 자체의 주체성까지 상실할 위험도 있다고 봅니다.

넓게 보면, 인수대비나 폐비 윤씨도 '하나뿐인 남자'를 두고 암투를 벌이다 비극적인 결말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 드라마에서 느껴야 할 것은 이런 것은 아닐런지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왕과나 #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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