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러시아 행정구요녕인민출판사
러시아 도시의 설계에서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구와 철도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것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인프라 시설의 일환이었지만 이후 현재까지 초기의 항구와 철도는 대련 도시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대련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인상깊게 느끼는 것이 중산 광장, 우호 광장, 3·8 광장과 같은 ‘광장들’이다. 이러한 광장의 시작은 바로 러시아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러시아가 처음 도시 계획을 할 때 그들은 유럽의 도시 설계를 차용하였는데, 광장은 특히 프랑스 파리 건설을 그 모델로 했다.
파리가 개선문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방사형 도시라면 대련은 당시 니꼴라예브스키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현재는 중산 광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주변의 건물도 일제시기에 바뀌었지만 과거 이 광장을 중심으로 10 갈래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계획되었다.
러시아는 이 중심 광장을 다른 원형 광장들과 연결하면서 시가지 도로망을 만들어 나갔다. 가장 큰 대로는 현재의 항만광장에서 중산광장을 통과해서 중국인 주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였는데 현재의 중산로(中山路)에 해당되는 길이다.
러시아는 여순은 군항으로 외부로 부터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대련은 자유 무역항으로 외부 세계에 개방하였다. 원래 러시아 도시 설계상으로는 5기의 부두를 건설할 예정이었고, 실제로 제 1기 공사를 진행하면서 2기가 완성되었다.
5기가 완성되었다면 규모로 따지면 1000톤급 선박 25척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는 부두 서쪽에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3천여 명의 러시아인이 대련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들은 러시아식 레스토랑에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서점, 과자가게, 세탁소, 약국 등과 같은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대련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중국 진출의 야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대련 지역을 포기하지 못한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 공격을 감행하면서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 당시의 국제 정세는 영국과 미국의 동맹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동맹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대립적으로 변화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과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일본에게 위협적이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퇴한 후 대련을 비롯한 만주 지역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영원한 부동항의 꿈은 좌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 시대 도시 계획을 다시 조정하고 변화시켜 그들의 식민 도시로 만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