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정업원구기 비각. 현판은 영조 어필이다. 정업원은 퇴락한 궁중여인들의 마지막 쉼터였다
이정근
행색은 남루했지만 여염집 아낙은 아닌 것 같았다. 단정한 용모에 빈틈없는 자태였다. 하인을 거느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드름 피우는 사대부집 안방마님도 아닌 것 같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여인은 양녕이 타고 가는 말고삐를 붙잡고 말을 세웠다. 갑작스러운 여인의 출현에 행렬이 잠시 혼란이 빠졌다.
"세자 저하! 세자 저하!"
창을 꼬나쥔 군사들이 눈알을 부라렸다. 세자는 개성에 있다. 세자는 경덕궁에 있는 충녕이다. 폐 세자 이제를 세자 저하라 부르면 국가에 역심스럽고 불경이다. 당장이라도 의금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양녕 호송을 책임진 원윤이 눈감아 주었다.
울부짖던 여인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양녕은 당황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호송하는 군사들도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돌발 사태를 파악한 군사들이 여인을 밀쳐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렬은 앞으로 나아갔다.
"세자 저하! 부디 평안하시오, 편안하시오."
양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여인은 경순옹주였다. 태조 이성계의 딸이다. 그러니까 태종의 이복동생이며 양녕의 고모였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 삼남매가 있었다. 방번과 방석 그리고 경순옹주다. 방번과 방석이 척살된 무인혁명 때 경순옹주의 남편 이제도 목숨을 잃었다.
태종이 경순옹주를 위로하며 후사를 돌보아 주겠노라 제의했으나 옹주는 거절했다. 지아비와 동생을 죽인 오빠의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보다도 싫었다. 홀로 남은 경순옹주를 불쌍히 여긴 태조 이성계는 손수 머리를 깎아주고 정업원에 들어가라 명했다.
정업원에 기거하던 경순옹주가 태종의 내침을 받고 양녕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잰 걸음으로 뛰어나온 것이었다. 가슴에 사무친 이복오빠에 대한 원한이 양녕을 뜨겁게 배웅하게 한 것이다.
숭인방에 자리 잡고 있는 정업원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오갈 데 없는 궁중여인들의 쉼터였다. 혜화궁주가 선배였고 정순왕후 송씨가 후배가 되었다. 절집도 아니고 사가도 아닌 정업원은 퇴락한 궁중연인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경순옹주는 이곳에서 아버지가 멸망시킨 고려 공민왕 후궁과 동거하는 기이한 인연을 이어갔다.
양녕의 유배행렬이 청계천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를 건넜다. 이 다리는 훗날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던 단종이 그의 비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던 다리다. 이때부터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