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일본경제를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일본경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흥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불행이 일본의 행복으로 연결되었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좀 더 크게 살펴보면, 일본경제의 번영은 주로 '중국의 불행'과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500년간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중국의 불행이 일본경제의 대도약을 위한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첫 번째 발판은 16, 17세기였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의 후유증과 여진족의 발흥으로 고심하는 사이에, 일본은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주력 상품 중 하나를 가로챘다. 그것은 무엇일까?
비단·도자기·차는 세계무역에서 중국의 주력 수출품목이었다. 오늘날의 IT 산업만큼이나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었던 이들 분야에서 명나라는 세계시장이 가장 선호하는 주력 품목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의 최첨단 상품들을 구입하느라,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대륙에서 강탈한 은으로써 중국에 물품대금을 결제했다. 15세기 이후로 세계 화폐인 은은 <아메리카-유럽-중동-중앙아-동남아 노선> 혹은 <아메리카-유럽-동아프리카-중앙아-동남아 노선> 또는 <아메리카-유럽-중앙아 노선> 아니면 <아메리카-필리핀 노선>을 거쳐 중국으로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이 많았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은이 중국에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비단·도자기·차가 그만큼 우수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하면, 중국에게는 전 세계를 상대로 '팔아먹을 만한 상품'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99년) 이후 이런 상황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일본인에 의한 대대적인 조선인 납치였다. 임란 시기에 조선인 피랍자들이 주로 일반 농민이 아니었다는 점에 중대한 함의가 들어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잘 알려진 대로 바로 '도공'들이었다. 납치한 조선인 도공들을 바탕으로 일본의 도자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 도자업과 일본 도자업 사이의 역전만 파생시킨 게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중국 도자업과 일본 도자업 사이의 역전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인 도공의 납치에 더해 대륙의 혼란이 일본 도자업의 대도약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1645년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도자기 수입량을 80%나 줄일 수 있었다. 이른바 수입상품의 대체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가 대륙을 석권한 때로부터 14년 뒤인 1658년부터 일본은 아시아·중동·유럽을 상대로 한 도자기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일본의 대도약은 자연히 중국 도자업의 위축을 가져왔다.
위와 같이 임진왜란 때에 조선 도공들을 대대적으로 납치한 일본은 임란으로 인해 명나라가 약화되고 여진족이 발흥하는 혼란을 틈타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주력 시장 중 하나인 도자기 시장을 빼앗는 데에 성공하였다. 17세기 이래의 이 같은 경제적 성장은 에도시대의 번영을 이루고, 나아가 19세기 일본의 또 한 번의 도약에 밑거름이 되었다.
두 번째 발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세기였다.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압박으로 청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서양 열강의 후미에 서 있던 일본이 1894년에 갑자기 전면으로 뛰쳐나오더니 청나라에 의외의 강펀치(청일전쟁)를 날렸다. 이후 일본은 중국 무대에서 주요 침탈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흔히 영국·프랑스 등 서양이 청나라에 강펀치를 날린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양 국가들의 중국 침탈은 생각보다는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다. 아편전쟁 이후 근 20년간 서양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1860년대 양무운동 이후로는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기력을 회복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아직 병세를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청나라에게 일격을 가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퇴원을 며칠 앞둔 환자에게 또 한 번의 일격을 가한 셈이다.
19세기 후반까지만, 중국 무대에서는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의 4강 체제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중국무대에 본격 침투한 이래 일본은 신해혁명(1911년) 시기에는 6강의 일원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미국과 함께 3강의 일원이 되었으며, 만주사변(1931년) 이후에는 미국과 함께 2강을 이루더니 중일전쟁(1937년) 이후에는 아예 단독으로 1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9세기 이래로 일본이 중국을 포함해서 아시아 각지에서 침탈한 각종 경제적 에너지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정상급의 경제강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일본인들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기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16, 17세기의 전환기 및 19세기의 전환기에 대륙의 지배자인 명나라·청나라가 흔들리는 틈을 활용하여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주력 상품을 빼앗거나 아니면 중국무대를 장악하는 방법을 통해 자국 경제의 대도약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중국과 일본의 숙명적 관계는 향후 일본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1978년 이래로 중국경제는 기본적으로 성장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미국의 영향력도 날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상승세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되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상승세가 예상되는 마당에, 일본이 차라리 중국에 편승하기보다는 자위대의 해외 진출 등 군사적 방법으로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서서히 약화되는 경제력을 일본은 경제적 방법이 아닌 경제외적 방법에서 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륙국가들이 예전처럼 앉아서 당하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중국만 상승하는 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통일 기운이 일어나는 등 대륙에서는 전반적으로 상승 기운이 감돌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상황은 일본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상승하는 동아시아 대륙국가들과 대결하는 대신 공생을 선택한다면, 일본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일부분은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모가 될지 도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공생 대신 대결을 택하는 것은 매우 모험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통한 군사적 위상 강화 등의 경제외적 방법으로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은 모 아니면 도의 결과를 낳는 '대결'을 선택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지분이 보장되는 '공생'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2007.11.04 12:25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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