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와 에드아르 부바의 <뒷모습>(사진집)
현대문학
<뒷모습>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상념은 다기(多岐)하다. 그리하여 책 제목 앞에서 충분히 뜸 들이는 것은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이형기의 시 <낙화>를 떠올려보아도 좋고 주자청의 수필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아도 좋겠다. 그러다 보면 읽는 이의 삶 가운데 겪었던 뒷모습들도 슬그머니 그 모습을 내민다.
에두아르 부바가 사진을 찍고 미셸 투르니에가 글을 쓴 <뒷모습>은 ‘사진에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즉 사진작가의 사진에 소설가의 상념을 얹은 책이다.
독자는 이 사진에세이 혹은 상념에세이에다 자기 나름의 상념을 하나 더 얹어보면 된다.
우선 옮긴이 김화영(문학평론가)의 시선부터 확인해 두자. 그는 ‘뒷모습’을 정직, 단순 소박, 골똘함, 너그러움, 쓸쓸함 그리고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나와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동지로 읽는다.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공격하려는 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등을 보이는 사람은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일 수 있다. 같은 방향, 같은 대상, 같은 이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심전심의 기쁨을 맛본다. 그가 보는 바다를 나도 본다. 그가 보는 봄빛을 나도 본다. 그가 떠미는 배를 나도 떠민다. 그가 화폭에 옮기는 파도를 나도 본다. 그가 나아가는 길을 어깨동무하고 나도 함께 간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는 사람은 그의 등을 보이며 예절을 갖춘다.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역자의 말’에서문득 신석정의 시 <작은 짐승> 속의 ‘난이와 나’가 떠오르기도 한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 없이 앉어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문장> 1939년 8월호에서칠판 앞에서 문제 풀이에 골몰해 있는 소녀를 본다. 소녀는 ‘등 뒤’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의 소녀의 ‘등 뒤’는 ‘골몰’을 보이는 것이리라. 소녀 앞의 ‘문제’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도대체 어떤 문제가 그 앞에 놓여 있기에?
‘미는 것과 당기는 것’은 합심하여 배를 미는 ‘등들’을 보여주고, 또 다른 사진 ‘기도’는 무릎 꿇고 수그려 둥글게 굽힌 ‘등들’을 보여준다.
‘계집아이와 두 마리 곰’은 곰 인형을 아기 업듯이 업은 소녀가 공원에서 졸고 있는 취객인 듯한 한 사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묘한 풍경을 보인다.
곰 인형의 뒷모습과 소녀의 뒷모습이 잇닿아 있는 것, 그리고 소녀의 앞모습과 사내의 앞모습이 멀찍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이 둘의 대조된 상황성이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머리털’이라는 글에 있는 두 장의 사진 중에 뒷장의 사진은 포옹 장면을 담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누군가를 ‘품에 안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그의 등 뒤로 두 손을 마주잡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
모로코의 에사우이라에 아랍 여인들이 서 있는 사진을 통해서는 ‘아나토피즘anatopisme’[ 지리(위상)의 위반. 홀랜드나 독일의 화가들이 성탄의 말구유를 자기네 고향 마을에다가 차려놓는 것이 그 예. 시간 순서의 위반은 ‘아나크로니즘 anachronisme’]을 이야기한다.
‘아기 업기’라는 사진은 아기가 기댄 등, 일종의 따스한 보호막을 생각게 하고, ‘잊혀진 천사’라는 사진은 세속의 등들에 가려진 순선(純善)의 슬픔을 엿보게 한다.
‘세상의 노래’는 쓸쓸함이며 ‘우정’은 어깨와 어깨의 나눔, 등과 등의 나눔이다. “흰 대리석으로 깎은 한 쌍의 남녀가 (저 앞에 두 점이 되어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살아 있는 한 쌍의 남녀를 지켜보는” 사진 속의 눈길이 자못 흐뭇하다.
그 품이나 감싼 모양이 대리석상이나 연인이나 어슷비슷하다. 마치 과거와 현재의 사랑이 다를 게 무어냐는 듯 묻기라도 하는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