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8일 재향군인회 초청 강연에서 "(남북)평화협정은 검증을 통해 핵을 완전히 폐기한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소연
이명박 후보가 전에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이명박 후보 홈페이지에 가보았다. 자료들을 검색해보니, 지난 7월 9일 이명박 후보 선대위에서 배포한 보도자료 '한나라당 한반도 평화비전에 대한 이명박 후보 견해'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의 예비후보로서 당의 ‘한반도 평화비전’ 정책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이끌어내면서 한반도 영토조항은 그대로 두어 전략적이고 유연하게 대비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당론도 아니고, 자신의 정책과는 다르다고 선긋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바로 이회창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출마선언을 한 바로 다음 날부터 누가 '보수의 적자'인가를 가리는 '이-이'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전날 이회창 후보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후보를 가리켜 "국가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철학이 없고, 대북관이 애매모호하다"고 비판했다.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나서자 이명박 후보도 이를 의식한 보수화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향군강연에서 보수층을 의식하여 연설문구를 상당 부분 수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보수적 정체성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연설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건국이념과 헌법정신 수호' '대한민국 정체성' '급격한 군축반대' 같은 용어들이 줄이어 등장했다.
이회창 후보가 "실패로 판명난 햇볕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모호한 대북관으로 북핵재앙을 막을 수 없다"고 자신을 비판한 것을 의식한 듯, "지난 10년간 원칙없이 유화적으로만 흐른 햇볕정책으로 인해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고 한미동맹이 이완됐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보수층의 지지가 이회창 후보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명박 후보도 자신의 보수성 부각시키기에 나선 모습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보수적자' 논쟁예상되었던 상황이기는 하다. 이회창 후보가 출마회견에서 이명박 후보의 정체성을 비판하고 보수층을 자극하는 극우적인 주장들을 내놓는 광경을 보며, 결국 이명박 후보를 오른쪽으로 견인하는 상황을 낳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후보는 그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후보가 그동안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제창해왔고, 그 결과 중도층의 지지를 얻었던 점을 돌아보면, 자기 중심을 잃은 빠른 변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창 후보가 계속 이명박 후보의 '모호한' 정체성을 비판하며 극우적인 주장들을 내놓을 경우, 이명박 후보가 '나도 보수'라는 식의 보수화 경쟁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무의미한 일이요, 우리 정치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낡은 이념대결이 이번 대선에서는 퇴조하는 경향을 보여왔었는데, 이제 갑자기 냉전시대의 낡은 이념적 주장들이 활개를 치는 대선판이 되어버린다면 이번 대선도 과거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필자도 이미 10월 29일자 <오마이뉴스> 칼럼
'이회창의 대권 3수는 국민모독죄'에서,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는 이번 대선을 다시 구시대적인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고 갈 위험이 크다"는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명박 후보도 자신이 제창했던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스스로 공수표로 만들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게될 것이다. 그동안 이명박 후보가 탈이념적 중도성향층의 상당한 지지를 얻어왔음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이회창 따라하기'가 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