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제의 마무리로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박도
지리산 연곡은 남으로 화개와 북으로 문수골을 끼고 있는 골짜기다. 예로부터 화개는 호남에서 영남을 오가는 관문으로, 마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찾아든 지리산 포수가 많이 살고 있어 고광순은 일군과 전투할 때, 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문수골은 천연의 험한 요새이니, 이 두 곳의 지리를 이용하여 유격전술을 쓴다면 대일항전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고광순은 그렇게 판단하고 의병진을 유격전에 편리하도록 소단위로 재편성하여 날마다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7년 9월, 화개동에 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만약 화개가 일군의 손아귀로 넘어가면 영남의병들과의 연락이 끊어져 영호남 양쪽 의병진이 곤경에 빠질 것으로 판단한 고광순은 9월 9일 새벽에 군사들을 보내 적진을 급습토록 하였다. 고광순 부대는 적 2명에게 중상을 입히고는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진중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은 곳곳에서 의병들의 습격을 받자 대대적인 섬멸작전으로 맞섰다. 그들은 광주주둔군 기노(木野)중대와 오까사끼(岡峙)경찰대, 그리고 진해주둔 중포대대의 도꼬로(所)소대를 징발, 의병의 본거지인 연곡사를 공격목표로 하여 쌍계사에 집결하고 있던 중, 화개에 주둔한 부대가 9일 새벽에 고광순 부대의 기습을 받았던 것이다.
고광순은 적들이 9일의 기습을 보복하고자 병력을 크게 보강하여 화개동을 기지로 삼아 반드시 연곡으로 쳐들어 올 것으로 판단하여, 미리 선제공격으로 군사들을 두 갈래로 나눠 내려 보냈다.
“청봉(晴峯 高光秀)은 일진을 거느리고 화개동 어구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이곳 연곡을 향하여 출정하거든 멀찍이 뒤따라오며 낌새를 살피어 후미를 공격하고, 정재(貞齋 尹永淇)는 또 다른 일진을 거느리고 연곡사 뒤쪽 상치재를 넘어가서 매복해 있다가 적이 연곡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이면 두 부대가 적의 앞을 동시에 공격하라. 한꺼번에 적의 앞뒤를 공격하면 적진은 반드시 교란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광순의 오판이었다. 고광순은 적의 본거지가 화개가 아니라 쌍계사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9월 10일, 적은 화개를 제쳐 둔 채 쌍계사에 집결한 뒤 아군의 청봉 부대와 정재 부대가 화개에 거의 다다를 저녁 무렵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곧장 가파른 계곡을 굽이굽이 기어올라 9월 11일 새벽 6시 무렵에 연곡사를 여러 겹으로 완전히 포위했다.